김명욱(목회학박사)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산다는 것은 삶이요, 죽는다는 것은 죽음이라 한다면 삶이란 죽음과 또 어떻게 다를까. 삶은 생(生)을 전제로 하며 죽음은 사(死)를 전제로 한다.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것은 삶, 곧 생이요 사람이 이 삶을 마치고 즉, 생을 마감하고 죽음으
로 들어가는 것은 곧 사(死)다. 세상에 공평한 것이 있는데, 그 공평한 것 중 하나가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 반드시 삶을 거쳐 죽음으로 들어간다는 사실 하나다. 여기에 공평이라 함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불공평했던 모든 것들이 삶이 마감되며 죽음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사람은 공평해지며 죽음이라는 두 단어 앞에 사자(死者), 즉 죽은 사람들이 됨을 뜻한다.
일부 고등 종교에서 말하는 죽은 사람들의 부활과 영생, 윤회와 전생과 해탈은 여기에 해당시키지 않겠다. 그 이유는 부활과 영생과 전생 및 윤회와 해탈은 해당되는 고등 종교에서 말하는 그들의 신앙과 교리이지 그것이 객관적으로 증명되어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게끔 과학적으
로 이성적으로 합리화돼 공공 교과서에 실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이런 교리는 철저히 신앙으로 받쳐진 믿음과 관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죽음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보험을 들어두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즉 고등 종교를 통한 사자(死者)의 보험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은 살다가 죽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어떻게 생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다 죽는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미인도 추녀도, 권력자도 보통
사람도 모두가 다 죽는다. 그런데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죽었다 살아 돌아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증언도 있긴 있지만 그들의 말을 100% 믿기는 어렵다.
또 고등종교에서의 부활과 영생과 윤회와 해탈도 100% 믿기는 힘들다. 그러나 보험을 들어 두는 것은 좋다. 이 보험이란 고등 종교에서 말하는 부활, 영생, 윤회, 해탈, 전생 등을 한 번 믿기로 하는 보험이다. 믿고 죽은 후 부활되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는 것이고 부활이 없어 그냥 죽음으로 끝나면 끝나는 것 아닌가. 그러니 밑져야 본전 아니겠는가. 그래서 죽은 다음의 일은 모르니 부활도 믿고 영생도 믿고 윤회도 믿고 전생도 믿고 해탈도 믿은 후, 죽은 다음에는 그 보험 들은 대로 찾아오면 될 것 아닌가!”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다. 부활과 영생을, 전생과 윤회와 해탈은 보험을 들어 둔다 해 놓아 ‘밑져야 본전’이라 할지라도 염라대왕이 눈을 부릅뜨고 커다란 쇠몽둥이를 들어 지켜보고 있으며 영원히 꺼지지 않은 불구덩이에 들어갈 수도 있는 지옥은 어떻게 보
험 들 것인가. 영생과 천국의 보험은 들어도 지옥의 보험은 어떻게 피해 갈 것인가. 얄팍한 상혼이 죽은 후에도 통할지는 죽어보아야 알 일이지만 삶 속에서 누리던 부와 명예를 ‘사자의 보험’을 들어 죽은 후에도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의 심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막연하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산다는 것, 즉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그 자체는 축복중의 축복이다. 삶 그 자체가 어느 고등 종교에서 말하듯 고(苦), 즉 고생이야 된다.
살다 보면 벼라 별 일을 다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고개 넘어 또 한 고개, 한 개울 건너 또 한 개울, 갈수록 첩첩산중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살아있는 한, 그 사람의 생은 최고의 축복 가치를 갖는다. 어떠한 삶의 형태를 유지하든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살아있음’ 자체가 복중의 복인 것이다.
얼마 전 친구 시인 한 사람이 세상을 달리했다. 이제 그 친구는 삶을 마감하고 영원의 품에 안겨있다. 간간이 신문지상에 시를 발표했던 그. 이제는 만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나의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의 음성과 그의 얼굴과 그의 몸동작 하나하나가 내 머릿속에는 그대로 입력돼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는 죽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그가 살아있다. 이것은 내 마음속에 피어있는 그 친구의 작은 부활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그 친구를 잊을 수 없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 친구는 나의 마음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회갑을 몇 년 안 남기고 간 그 친구를 생각하며 나도 언젠가는 그 친구의 뒤를 따라 삶을 내려놓고 죽음의 길로 들어서리라 본다. 삶과 죽음. 생(生)과 사(死). 태어난 생은 반드시 사를 맞는다. 죽음 후의 일은 죽은 자의 몫이다. 미망인과 외아들. 삶의 위로와 축복이 남은 자들에게 있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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