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대선경쟁이 이명박 후보의 확정으로 막을 내렸다. 당 후보 확정이 마치 대통령 당선이나 되는 듯 경선 결과는 이곳 LA에서도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다.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짐짓 무관심을 가장해 마음속에 묻어 두고 있던 한국정치에 대한 관심이 다시들 꿈틀대는지 밥자리, 술자리에서 향후 정국과 관련해 나름대로의 해설과 전망들을 내놓으며 열을 올리는 모습들이다.
이번 한나라당 경선 결과는 여론조사와 관련해 두 가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하나는 한국사회에서 실시되는 조사의 부정확성이고 다른 하나는 여론조사 영향력의 비대화이다. 내용은 부정확한데 그 영향력은 비대화 되는 현상은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조합이라고 볼 수 있다.
경선 결과 발표를 앞두고 나온 여론조사 기관들의 예측은 거의 모두가 빗나갔다. 이명박 후보는 진땀승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오히려 박근혜 후보에게 졌다. 이렇듯 정확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는 여론조사 결과가 수많은 정치인들의 행로가 걸려 있는 경선의 승패를 갈랐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여론조사는 말 그대로 그때그때 여론의 흐름을 알아보는 풍향계일 뿐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마치 여론조사가 ‘전가의 보도’처럼 받아 들여지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온갖 기관들이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지지율 조사를 쏟아낸다. 정신 사나울 정도이다. 여론조사는 과학이고 숫자는 객관적이라는 맹신이 사회를 휩쓸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여론조사 결과가 ‘측정의 기능’을 넘어서 ‘최종 판단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마치 체온계로 질병의 유무를 정밀 진단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한국만의 우스꽝스런 현상이다. 지난 2002년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단일화 작업에 여론조사가 동원된 것이 ‘여론조사 만능주의’의 시초였다.
당시 결정방식은 하루만에 실시한 조사로 0.1%만 이겨도 후보가 되는 OK 목장식 결투였다. 여론조사의 ABC를 무시한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논란을 단칼에 잠재울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인지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결정은 일반화되는 추세이며 결국 한나라당 대선후보까지 여론조사에 의해 결정됐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여론조사에 얼마나 솔직하게 응할까. 여론조사에서 통계적 모순이 많이 나타나는 질문은 사생활에 관한 것들이다. 특히 성 문제에 관한 질문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가령 지난 1993년 프랑스서 실시한 ‘최근 5년간 관계했던 성 파트너 숫자에 관한 조사’에서 여성 응답자들은 평균 1.6명의 파트너가 있었다고 응답한 반면 남성들은 두배에 가까운 2.9명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인구의 성인남녀 성비가 비슷하다면 대답도 엇비슷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응답자들이 솔직하지 않았다는 가정이다.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이 진심만을 말할 것으로 믿는 것은 순진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사 방법과 검증이 중요한 것이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자신의 속내를 모르는 남에게 털어 놓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또 응답률도 낮다. 이런 문화적 이유 때문에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는 표본오차율이 조사기관에서 밝히는 수치보다 훨씬 크다고 보면 된다.
당심에서는 이기고도 여론조사에서 뒤져 대통령 후보 자리를 내 준 박근혜 후보로서는 억울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상호 합의한 경선 룰에 따라 나온 결과인 만큼 억울해도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당 후보 결정에 적용하는 것은 정당정치의 본령과 관련해 볼 때 바람직하다고 보기 힘들다.
19세기의 뛰어난 외교관이자 민법학자인 영국의 제임스 브라이스경은 훌륭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이유로 진흙탕 싸움인 당내 경선을 지적했다. 훌륭한 인물들을 저지시키면서까지 벌인 집안 싸움에서 최종후보 결정권은 집안 구성원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 정당정치의 기본이다. 당내 경선에 일반인 여론조사를 반영한 것은 ‘한국적 창조물’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지나친 여론조사의 오·남용은 그만큼 정치의 뿌리가 취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2012년 12월 어느날 오후. 영주권자인 기자에게 전화가 한통 걸려온다. “여기 한국의 여론조사 기관입니다. 차기 대통령을 여론조사로 뽑기로 한 것 알고 계시죠. 그래서 한국과 해외에 거주하는 유권자들 가운데 1,000명을 표본 추출해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도로 딴나라당’ 대통령 후보와 ‘무늬만 통합신당’ 대통령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십니까.” 일어날 수 없는, 또 일어나서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요즘 한국정치에서 여론조사가 기형적으로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면서 한번 떠올려 본 공상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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