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민주주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데에 비해 매번 대통령 선거가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치러져 왔다. 이번 선거 역시 박근혜 후보의 등장으로 예외는 아닐 듯하다. 신라시대 이후 1,400여년 만에 한국에서 여성 통치자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이번 선거는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인지하고 있듯이 박근혜 후보는 과거와의 연결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한 까닭에 박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당선된다면 한국역사, 민주주의, 그리고 정체성이라는 맥락에서 풀어야할 많은 과제들을 가져올 것이다.
한국의 덜 성숙된 민주화 과정에서 1997년의 재정위기는 전례가 없는 국가적 비상사태를 초래했고 마침내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강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경제적 도약이라는 박 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 덕분이었다. 반면 정치가들, 지식인들, 그리고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의 경제적 업적과 별도로 유신 등 그의 독재정치가 반복되어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재숙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현대화의 의미를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 되는 가운데 박 후보가 보수 세력의 대표로 급부상하는 현상은 어쩌면 그가 아버지 유물로 대표되기 때문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박 대표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그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보다 그녀가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후보로서의 자격과 관련, 민주주의에 있어서 세습권력의 현 주소가 어디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세습권력의 문제는 어쩌면 한국근대화 전반에 걸쳐 부지불식간에 계속 중심이 되어온 문제였다. 필자는 2004년에 출판된 졸저(Beyond Birth: Social Status in the Emergence of Modern Korea)를 통해 한국 근대이행 과정에서 사회신분 결정 요소가 조선시대의 출생신분제도 보다 많아졌지만, 사회적 신분은 여전히 특권과 재물을 가지는데 강력한 영향을 미쳐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귀족정치와 군주정치의 세계역사는 세습권력의 폐단을 여실히 증명했다. 즉, 세습권력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무능하리 만큼 비효율적이고 때로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정치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평가하는데 반드시 고려할 요인들이 많이 있지만, 타고난 신분이나 배경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우선순위를 차지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전 통치자의 아들이나 딸이라는 조건은 훌륭한 통치자를 결정하는 필수 조건보다 우선할 수 없으며, 훌륭한 통치자 또는 좋은 통치자가 전 통치자의 후손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가까운 예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물론 부시 대통령은 텍사스 주지사로 정치적 기반을 구축했다. 그러나 좀 더 살펴보면 이 기반은 그의 불충분한 자격을 가리는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부시는 자기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도 텍사스 레인저스의 부분 소유권을 가졌고 이를 발판으로 텍사스 주지사 후보로 출마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 부시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성인으로서 자기 삶에 충실하지 못 했었다.(한 예로 그는 사업에서 몇 번의 실패로 투자자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러한 부족한 능력과 인격에 합당한 결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자기 아버지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같은 위험이 또 있다. 바로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경우이다. 모든 검증 가능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힐러리는 부시와 다르지 않은 예이다. 2000년 그가 상원의원이 된 것은 뉴욕주의 독특한 선거방식 덕분이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힐러리는 빌 클린턴의 딸이 아니므로 타고난 신분에 의해 특권을 부여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전 대통령의 아내였음으로 상원의원이 될 수 있었고, 전 대통령의 아내라는 신분이 그를 차기 대통령후보로 나설 수 있게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사회에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 만약 미국민들이 다음 대선에서 힐러리를 선택한다면 그의 첫 임기가 끝나는 2013년, 미국은 4반세기를 ‘클린턴’과 ‘부시’라는 이름의 대통령만 갖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미국을 군주정치국가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실제로 빌 클린턴과의 가족관계가 궁극적으로 그를 선택하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부시의 당선 및 재선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나쁜 결과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인들과 미국인들은 비슷한 상황을 맞고 있다 - 그야말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최초의 여성 통치자 탄생.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볼 때 좀 더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황경문 / USC 한국학 연구소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