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이나 덕수궁 같은 옛 궁궐에 가보면 항상 만나는 친근한 석조상이 있다. 사자 비슷한 모습에 머리 한 가운데 뿔이 돋아있는 동물, 몸의 털은 푸른색이라고도 한다. 중국 문헌 ‘이물지’에 “동북변방에 살며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안다”고 소개된 상상의 동물, 해태이다.
해태가 궁궐의 입구부터 요소요소에 자리 잡고 앉아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상상의 동물이다 보니 설도 구구한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해태는 비리를 못 참는 정의의 화신이라고 한다. 성품이 우직하고 정직해서 사람들이 싸우면 거짓말 하고 잘못하는 쪽을 가려 뿔로 받으며 혼을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궁궐을 드나드는 관리들이 비리에 휩쓸리지 말라고 해태상이 세워졌고, 잘잘못을 심판하는 대사헌의 흉배에는 그 무늬가 새겨졌다.
돌로 된 해태상이 벌떡 일어나 궁궐 밖으로 나온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아수라장이 될 것 같다. 특히 요즘 한국에서는 해태가 과로사할 만큼 혼낼 대상들이 많다. “과거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싶게 거짓말 사건들이 줄줄이 터져 나온다. 도덕적 해이가 점점 심해진다.
미술계에서 스타 큐레이터로 잘 나가던 여성이 학력을 완전히 위조한 것으로 드러나 교수직에서 물러나더니, KBS 라디오의 인기 영어 프로그램 진행자가 또 학위를 속인 사실이 드러나 사퇴했다.
‘가짜 학력’에 놀란 학계, 문화계가 진위 검증에 칼날을 세울 분위기를 보이자 만화가 이현세 씨도 오랜 체증을 털어내듯 ‘양심선언’을 했다. 80년대 초반 ‘까치와 엄지’로 갑자기 유명해져 난생 처음 인터뷰를 하자니 우쭐한 기분에 학력을 ‘대학 중퇴’라고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번 그렇게 말하고 나니 ‘사실은 고졸’이라고 돌이킬 수도 없어 25년간 거짓말을 한 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얼마 전 ‘때렸다 안 때렸다’로 떠들썩했던 재벌그룹 관련 폭행 사건도 결국 진상은 그룹 회장의 거짓말로 드러났고, 19일의 한나라당 대선 경선후보 검증 청문회도 말하자면 거짓말 가려내기 청문회인 셈이다. 정치인들은 워낙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들로 정평이 나있으니 대선이 가까워오면서 얼마나 더 많은 다양한 거짓말 공방이 터져 나올지 기대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법 어기는 일 없고 남에게 해 끼치는 일 없이 선량하게 살아가는 우리 보통 사람들도 거짓말을 밥 먹듯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매서추세츠 대학 심리학과의 로버트 펠드먼 교수가 학생들 121쌍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보고서가 있다. 초면인 두 학생은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도록, 혹은 능력 있게 보이도록 신경 쓰면서 10분간 대화를 나누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들의 대화는 모두 몰래 카메라로 녹화돼 나중에 당사자들이 대화 중 거짓말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게 하는 것이 실험내용이었다.
놀랍게도 참가자의 60%는 그 짧은 대화 중 거짓말을 한 것으로 시인했다. “내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할까” 싶어 모두 놀랐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보통사람들이 하루에 최소한 25번 거짓말을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대개 이런 거짓말들이다. 친구가 새 옷을 샀으면 맘에 안 들어도 “예쁘다”, 별로 반갑지 않은 사람을 만나도 “정말 반갑다”, 전화하기 싫어 미루던 상대에게는 “계속 전화했지만 통화 중이었다”, 저녁 초대를 받으면 맛없어도 “너무 맛있다” 등의 사교용 거짓말들. 그리고 약속시간에 늦으면 “차가 밀려서”, 배달 음식점의 “방금 떠났는데요” 등 면피용 거짓말도 우리가 밥 먹듯 하는 거짓말에 해당된다.
우리는 왜 이런 거짓말들을 할까. 거짓말을 생존술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있다. 약육강식의 생존현장에서 힘없는 자들이 어떻게 정직으로만 맞서겠는가. 큰 동물 앞에서 납작 엎드려 죽은 체하는 동물의 위장술은 사람으로 보면 거짓말이다.
학위 거짓말도, 정치인의 거짓말도, 재벌의 거짓말도 결국은 그 무대에서 밀려나지 않고 남보다 더 잘 살아남으려는 생존술이라는 것이다. 남의 기분 헤아리는 ‘하얀 거짓말’도 알고 보면 생존술. 원만한 대인관계는 최고의 생존전략이라는 인식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중요한 것은 거짓말 자체보다는 말의 내용이다. 시시비비를 가릴 내용이라면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나 대가를 치르는 것이 거짓말의 최후이다. 경복궁 해태의 응징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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