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장기영 사주는 사람 쓰는데 있어 편견이 없었다. 그는 1960년대 한국신문으로서는 처음 기자를 공채하면서 응시자격에 학력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런 채용 방침은 실력보다 학력을 중시하던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파격이었다. 지금 기준으로도 파격이지만 말이다. 고등학교만 졸업했어도 기자가 될 수 있었으며 실제로 기자가 된 고졸들이 있었다. 이들이 대졸 못지않게 기자로서 역량을 발휘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사위나 손아래 친척여성의 남편을 부를 때 흔히 ‘서방’(書房)이라고 한다. ‘책이 있는 방’이란 뜻인데 이 말속에는 책을 읽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선망이 잘 드러난다. 책 읽는 사람을 남자의 이상형으로 간주하는 유교적 의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어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식은 대학들의 교수 채용 요강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LA지역 신문에도 한국의 대학교수 채용 광고들이 자주 실리는데 자격은 예외없이 ‘박사학위 소지자 이상’이다. 한국의 대학교수 사회는 한마디로 ‘박사 천국’, 그것도 ‘외국박사 천국’이다. 박사학위 없으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아예 강단에 서는 것이 원천봉쇄되는 풍토이다 보니 외국산 가짜 박사학위 파동이 주기적으로 터질 수밖에 없다.
같은 유교문화권인데도 일본사회는 학력에 대해 우리처럼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저명한 교수들 가운데는 박사가 아닌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교수 뽑을 때도 학위보다는 현장경험과 연구업적을 더 중시한다. 달랑 대학만 졸업하고 중소기업 연구소에서 일하던 다나카 고이치라는 이름 없는 연구원이 노벨 화학상을 받은 나라가 일본이다.
신정아라는 한 젊은 ‘미술인’이 저지른 가짜 박사학위 사기극이 화제가 되고 있다. 대학부터 대학원과 박사과정까지 학력을 위조하고, 위조한 학력을 자산으로 미술계에서 떠오르는 별로 행세하던 이 여성의 사기행각은 학벌숭배 풍토가 낳은 한편의 코미디다.
그런데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신씨의 학력이 부풀리기 차원을 넘어서 온통 위조였음에도 그녀가 여러 박물관의 큐레이터로서 상당히 능력 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는 사실이다. 가짜와 관련한 일화들 가운데 찰리 채플린을 둘러 싼 얘기가 빠질 수 없다. 몬테카를로에서 열린 한 가장 무도회에서 찰리 채플린 닮은 사람 선발대회가 벌어졌다. 대여섯명이 출전해 찰리 채플린 흉내를 냈다. 참가자 가운데는 진짜 채플린도 들어 있었다. 대회 결과 진짜 채플린은 1등은 커녕 3위에 머무르는데 그쳤다. 진짜 채플린보다 더 채플린 같았던 참가자가 2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진짜’가 오히려 ‘가짜’만도 못하고 ‘가짜’가 더 ‘진짜’같은 경우가 종종 있다. 짝퉁 명품들 가운데도 진품보다 더 진품 같아 보이는 제품들이 많다. 위조된 명문 학벌로 포장된 ‘큐레이터 신정아’도 그랬다.
미술계 인사들은 ‘명문 예일대 박사 출신’ 신정아가 내놓는 전시회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미술계 인사들에게 만약 ‘고졸 신정아’가 똑같은 기획을 내놓았더라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을까.
신씨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녀는 결과적으로 미술계 기득권층을 농락하고 무분별한 학벌숭배 풍토에 한방 먹인 셈이 됐다. 이것을 빗대 “장하다 신정아”식의 냉소적 풍자도 많이 회자된다. 그렇다고 그녀의 행위가 실정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책임을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정아 스캔들’은 “당신들 역시 브랜드 신봉자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년 전 영국의 소비자 잡지가 양주업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여러 종의 위스키에 대해 상표를 가리고 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실시했다. 놀랍게도 가장 높은 평점을 받은 위스키는 수퍼마켓 판매용 저가제품인 샌즈베리였다. 고급 브랜드의 대명사인 글렌피히디는 꼴찌를 차지했다.
비싼 술이 더 맛있다고 하는 세평은 다분히 “비싼 술이 더 맛있을 것”이라는 브랜드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다. 학벌 좋은 사람이 더 실력 있을 것이라는 인식 역시 브랜드 효과의 힘이다. 물론 비싼 술이 더 맛있고 학벌 좋은 사람이 더 실력 좋을 개연성은 분명 더 높지만 종교적 믿음처럼 절대적인 것은 될 수 없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와인과,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이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지 않은가.
블라인드 테이스팅 결과에 충격 받은 한 기자는 “위스키에 얽힌 속물 근성과 비밀을 수많은 사람들이 꿰뚫게 되면 위스키 업계는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썼다. 이 촌철설인의 지적은 브랜드 숭배에 빠져 있는 이들이 감추려 전전긍긍하고 있는 바로 그 고민이 아닐까 묻고 싶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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