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동창들끼리 모여서 삶의 기미 같은 거뭇한 스트레스를 털어내기도 한다. 어느 집이나 이런 저런 사정이 있고, 다면체의 삶에서 어느 구석에든지 그늘이 있게 마련이다. 서로 토해내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시원해지기도 한다. 대개는 남편의 건강이나 아이들의 결혼 문제가 탑 메뉴다.
“요즈음 애들은 결혼이 하나의 선택이 돼 버렸단다. 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왜 결혼해서 생활을 구속시키고 신경을 쓰느냐는 거지”
시쳇말로 골드미스인 39세의 딸을 둔 친구의 말이다.
“우리 애는 여자 친구가 계속 바뀌고 있단다. 이번에는 결혼하려나 싶으면 헤어지고 또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잖니. 벌써 몇 번째인지 몰라. 결혼 안하고 일생 연애만 하려나봐”
이젠 늙은 총각이라서 나이를 카운트하기도 싫단다.
“우리 아들은 며느리와 은행 어카운트도 따로 쓰며, 행동도 제 각각 편리할 대로 살고 있으니 결혼했으면서도 동거인 같더구나. 철저히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면서 각자 자기 일과 취미에 충실하니 친구인지 하숙생인지… 아이 낳을 생각도 전혀 하는 것 같지 않아.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세상이 우리만 세워놓고 변해 버렸나 봐”
현재 한국에서의 생활방식인 부인들 따로, 남편들 따로의 생활, 부부이면서도 홀로인 생활, ‘나 홀로’ 족 같은 부부생활인 것 같다.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웃의 말로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된 직장을 가진 30대의 여성들이 결혼할 생각을 안 한다고 한다. ‘나 홀로’의 사조가 팽배해, 지금 편하고 하는 일에 재미가 있어 장래가 보장됐는데 결혼해서 시집 눈치 보며 아이들 키우면서 구질구질하게 살기 싫다는 것이다. 지금인 현재가 가장 중요한데 30대의 젊음을 즐기고 결혼은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 권인지도 모른다.
2007년 ‘이상 문학상’을 받은 전경린씨의 단편소설 ‘천사는 여기 머문다’도 소위 섹스 없는 ‘백색 결혼’이라는 생경한 단어와 비록 외국인이라도 사랑보다 삶 자체에 의미를 두는, 감정이 삭제된 직업 같은 결혼을 수용하는 새로운 소설이다.
‘깊은 마음을 제 속에 간직한 채, 아이도 만들지 않고, 친척도 없이, 나로 인해 아무도 상처받는 사람도 없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이루려는 것 없이 함께 살아가는 일’ 즉 21세기의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잘 집어 일부 한국의 젊은이들의 결혼과 인생에 관한 가치관의 변화를 많은 은유와 상징으로 창작해 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현대인을 가리켜 ‘자기도취와 자기애에 빠져 막다른 골목으로 향해 달리는 행복 추구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결혼은 전생의 인연으로, 운명적이며 해야 할 때가 있다는 불교의 정혼설의 말은 옛말이 되었다. 현재 편안하니까 새로운 변화로 일상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겠다는 자기 사랑 속에는 자유는 맘껏 누리나 의무나 윤리 같은 구시대적 관념을 회피하려는 이기주의가 내재한다.
최근 TV 광고에서 ‘주몽’의 여주인공 소서노가 그 어여쁜 미소와 깨끗한 이미지로 콘도 키를 들며 그 콘도를 사라고 유혹한다. 실제로 많이 팔렸다는 신문보도이다. 여자들도 반하는데 젊은 남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은 물어 무엇하리. 그녀가 하는 말, ‘출생은 운명이지만 주거지는 선택이다’
출생은 자기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결혼은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생의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에 결혼이야말로 분명한 선택이다.
미국은 요즘 결혼시즌이다. 우리 상점에도 웨딩카드를 비롯하여 앨범이나 선물, 포장지가 많이 팔린다. 젊은 여성들이 와서 약간의 기분 좋은 흥분을 느끼며 웨딩샤워나 결혼 카드와 선물들을 사간다. 친구의 앞날을 축복하며 자신의 미래를 꿈꿔보는 흐뭇한 순간이기도 하다.
사랑이 삭제된 결혼은 만화나 소설에서는 가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적나라한 삶에서는 가장 중요한 기본적 감정이 없는 삭막한 모래밭을 일생동안 걷겠다는 말과 같다. 물 없이 생물이 생존하지 못하는 것처럼 삶의 윤활유인 사랑 없이 인생의 많은 굴곡을 어떻게 헤쳐 나가겠는가?
김인자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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