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 오래 전에 본 영화라서 기억이 가뭇하다. 그 줄거리만 대강 생각난다.
한 청년이 외딴 곳의 타운을 들르게 됐다. 사람들은 친절하다. 그러나 어딘가 그림자가 보인다. 무법자의 무리가 주기적으로 나타나 약탈에 압제를 가하기 때문이다.
청년은 스스로를 지킬 것을 역설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무법자들이 다시 나타났다.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는 가운데 청년은 단호히 맞선다. 순간 무법자들은 사라진다.
유령도시였다. 사람들은 그 비겁함 때문에 주술(呪術)에 걸렸던 것. 용기를 가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무법자의 잔학에 시달려야 한다는…. 그 저주의 사슬을 청년이 깬 것이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무엇일까. 금송아지 앞에 절을 한 우상숭배가 아닐까. 야훼가 그 날뛰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고 진노해 진멸하겠다고 까지 했으니.
많은 유대교 랍비들은 다른 답을 내놓고 있다. 각 지파 대표 12명이 뽑혀 가나안 땅을 정탐했다. 그 중 다수, 다시 말해 패배주의자들의 보고를 받아들인 것이라는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외면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은 스스로 두려움의 포로가 됐다.
가나안 땅의 소망을 버렸다. 그리고는 압제와 포학에 굴복한 것이다. 그 죄가 우상숭배보다 더 크다는 거다. 때문에 약속된 땅에서의 자유가 거부됐다. 그 세대는 그리고 광야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전쟁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중동사태와 관련해 들려오는 소리다.
이라크에서 미국은 이미 패배했다. 핵을 가진 이란과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워싱턴에서 나오고 있는 말들이다.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평화주의의 목소리만 들린다. 게다가 노골적인 유화의 제스처다. 그런데 전쟁의 우려만 높아져서다.
팔레스타인에서 내전이 발생했다. 하마스가 무력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팔레스타인의 민주주의를 짓밟은 것이다. 레바논에서는 차량폭탄이 터졌다. 반(反)시리아파 의원이 또 암살됐다.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한 무장집단이 레바논 정부군에 공격을 가했다. 수명의 레바논 병사의 목을 베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게다가 잇단 나포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영국 수병 15명이 나포된 게 언제였던가. 그들이 석방되기가 무섭게 4명의 이란계 미국인이 나포됐다. 역시 이란에서다. 그리고 이스라엘군을 향해 로켓포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헤즈볼라가 1년 만에 다시 포문을 연 것이다.
‘미국을 타도하라, 이스라엘을 말살하라’-.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의 외침이다. “서방이 마침내 굴복하기 시작했다.” 승리를 목전에라도 둔 양 의기양양한 선언이다.
하마스도, 헤즈볼라도, 그리고 시리아도 모두 이란의 영향력 하에 있다. 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무엇을 의미하나. 이란이 자신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미국, 이스라엘, 더 나가 서방을 우습게보게 됐다는 것이다. 왜. 패배주의, 평화주의, 유화의 목소리만 들려 와서다. 그 미국을 나약한 존재로 본 것이다.
그런 인식이 전쟁을 불러올 수 있다는 일부의 우려다. 히틀러가 그랬다. 미국을 데카당의 나라로 봤다. 영국은 겁쟁이의 나라이고. 때문에 거침없는 도발을 해왔다. 그 결과가 2차 세계대전이다.
성숙한 민주체제끼리 전쟁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전쟁은 항상 비(非)민주체제가 먼저 시작했다. 민주체제를 나약한 존재로 오해해서다. 오늘날의 상황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 한 차례의 대전이 발생한다면 그 전쟁은 중동에서 시작될 것이다.” 한 유명한 역사학자의 예언이다.
민족 집단의 붕괴가 발생한다. 경제가 소용돌이친다. 한 때의 제국이 퇴조기를 맞는다. 그가 든 대전 발발의 조건들이다. 오늘날 중동지역은 이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그뿐이 아니다.
젊은 남성 인구가 과잉상태다. 석유 등 에너지 부존자원이 엄청나다. 그리고 가장 혁명적인, 그러므로 가장 위험한 체제가 핵무기를 곧 손에 넣게 된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지는 해, 과거의 제국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마겟돈 전쟁이 현실로 임박했다는 지적이다.
그러면 무엇이 전쟁을 막나.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다. 민주체제는 결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단호함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의 분위기는 그와 정반대다. 겁쟁이로 보인다. 1938년의 유럽을 연상시킬 정도다. 유화정책 끝에 히틀러에게 끌려 다니기만 한.
압제와 포학과의 싸움은 지상명령이다. 그 압제세력에 굴복하는 죄는 한 때의 우상숭배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 유대교 랍비식의 해석은 한국에도 적용되는 게 아닐까. 또 다른 형태의 폭정체제와 대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sechok@koreatimes.com
옥 세 철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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