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전 일본의 소설가 겸 영화감독 무라카미 류가 직업 안내서를 펴낸 적이 있다. 소설가나 영화감독, 혹은 디스크자키나 TV 토크쇼 사회자, 아니면 히피 등 그의 다양한 이력 중 그 어떤 것을 들이밀어 봐도 ‘직업 안내서’는 뜻밖이었다. 자유분방한 그의 이미지와 500여 직업들을 설명하는 백과사전적 작업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아, 이런 직업 안내서도 있을 수 있구나!”하고 감탄을 한 것은 책의 목차를 보고 나서였다. 한국어로도 번역된 그 책을 직접 구해볼 수는 없었지만 한국의 출판사가 인터넷에 올린 책 소개를 보았다. 책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직업의 세계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목차를 보니 그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예를 들어 제1장 ‘자연과 과학’편에는 이런 항목들이 이어진다 -‘꽃과 나무가 좋다’‘동물이 좋다’‘벌레가 좋다’‘불과 불꽃과 연기가 좋다’‘별과 우주가 좋다’ 등. 청소년들이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장래의 직업으로 연결시키도록 안내하려는 의도였다.
하물며 그는 특별히 좋아하는 게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는 것이 좋다’ ‘야한 것이 좋다’‘싸움이 좋다’등의 항목을 만들어 그에 맞는 직업들을 추천했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세상에 잘난 사람·못난 사람 있고, 부자·가난뱅이 있지만 직업과 관련해 나누자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딱 두 종류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 그래서 열정을 가지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게 인생을 잘 사는 지혜라는 말로 연결이 된다.
며칠 전 칸 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여우주연상을 타는 장면을 보면서 무라카미의 이 메시지가 생각났다. 눈부신 미모나 관능미 없이 그저 말간 얼굴로 악바리처럼 연기에 매달리는 전도연도 아름답지만, 그보다 더 눈을 끄는 것은 이창동 감독의 변신이었다.
노무현 정권의 첫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일하던 1년 반 동안 그는, 그렇게 봐서 그런지, 항상 남의 옷 걸친 듯 떨떠름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3년 후 감독으로 지금 우리 앞에 되돌아온 그의 모습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빛이 난다.
지난 2002년 ‘오아시스’로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을 때 그는 ‘다음 작품’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런 대답을 했었다 - “머릿속에서 자라게 둘 것이다. 다 자라면 나가겠다고 노크할 것이다”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차츰차츰 차올라서 도저히 더 이상 눌러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일을 해낼 때의 그 폭발적 에너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까.
“장마 걷힌 냇가/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은피라미떼 보아라/산란기 맞아/얼마나 좋으면 ……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푸른 햇발 튀는구나”<고재종의 ‘날랜 사랑’중에서>같은 지순한 희열이 아닐까.
공자는 우리의 인생살이를 지·호·락(知·好·樂)의 3단계로 구분했다.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知之者 不如好之者 好知者 不如樂之者)” -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는 말이다. 안다는 것은 진리를 머리로 파악한 정도의 상태, 좋아한다는 것은 그 진리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인 상태, 즐긴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삼아 몸에 밴 상태로 해석이 된다.
우리 삶의 큰 축인 ‘일’을 공자의 3단계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겠다. 같은 직업이라도 기본 지식 익혀 기계적으로 하는 사람과 일에 재미를 느끼며 하는 사람, 그리고 일에 열정적으로 빠져서 자나 깨나 그 일 생각뿐인 사람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돈이나 명예를 위해 택한 일을 할 때와 가슴 터질 것 같은 열정 때문에 선택한 일을 할 때와는 삶의 질이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없다.
이제 밥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무엇을 하든 먹고는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밥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르고, 몇 시간을 매달려도 한 순간 같이 느껴지는, 지독한 연애 같은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면 방법은 하나이다. 지금 하는 일에 열정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 자녀들에게는 그런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면 한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