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태(시인)
타향살이가 서러운 것은 고향을 떠나서 산다는 이유에서도 아니고, 낯선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만도 아니다. 미국이 아무리 우리에게 타향이라 하지만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거의 같은 음식을 먹고, 거의 같은 양식의 생활을 하기에, 의사 소통이나 감정의 소통이 무엇보
다도 쉬울 것 같은데 사실은 미국사람이나 혹은 어디에서 왔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막연한 사람들이 더 쉽게 소통이 되고 교류가 쉽다고 여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식물학자에 의하면 나무도 허허벌판에서 혼자서 큰 나무보다는 머리를 맞대고 섞여서 숲을 이루어 자라는 나무들이 더 잘 자라고 튼튼해진다고 한다. 잡초나 잡목들이 끼어들지 않는다면 잡초나 잡목들의 생리와는 다르게 옆에 있는 나무를 방해하지 않고 같이 크기 때문이다. 사람
도 외아들보다는 형제가 있는 자식이 튼튼하게 자란다. 같이 뒹굴며 크기 때문이다.사람이 키만 큰다고 성장하는 것인가? 사람은 하루마다, 한달마다, 아니 적어도 일년에 한번쯤은 허물을 벗어야 성장하는 것이다. 외면하는 버릇, 오해하는 버릇, 격하하는 버릇, 개인을 향한 사대주의적 생각, 사치하고 싶은 욕망, 빈 속을 포장하여 남 앞에서 헛된 짓 하는 것, 모두 버려야 한다. 그래야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성장하게 되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사회도 그러하려니와 개인도 믿음 속에서 서로 서로 발전하는 법이다. 믿음이 있으면 계약이 필요 없는데 미국사회는 계약의 사회다. 변호사 마저도 시간을 많이 써가며 골치가 아프게 들여다 보아야 할 만큼 세심한 조건이 많은 계약서,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다민족 사회이
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모르니 믿을 수가 없어 크던 작던 거래에서는 계약서가 필수요건이다. 말로서는, 언약으로서는 계약이 되지 않는다. 믿지 못하는 상호 불신의 표면적 표현이다.계약이란 것을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인간성 상실에서 오는 결과이고 믿음의 부재에서 오는
서글픈 현상이 아닐까?
사랑하는 데에도 계약이 필요한지 결혼을 하는 데에도 결혼신고를 해야 하고, 심지어는 서로가 좋으니 우선은 임시로 살아보고 백년해로는 나중에 보자는 계약결혼도 있다. 사랑에도 인간성 상실과 동물성 욕구만 존재하고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대의 부정적 철학의 표현이다. 서글프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고 정주영 회장 사이에 계약서가 있었다면 평지의 평수가 얼마 되지도 않는 한국의 지형에서 경부 고속도로가 세계가 입을 딱 벌리는 그런 짧은 시일 내에 완공을 할 수 있었을까?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을 믿었고 정주영 회장 또한 박정희 대통령을 믿었기에 계약서 대신 언약으로 서로의 가슴을 뜨겁게 했고 굳게 잡은 두 손으로 서로의 등을 쓰다듬은 것이었다. 무 계약은 계약을 넘는 실적이 가능하다. 믿음 때문이다. 아들의 청은 손해가 되고 부담이 되더라도 더 해주고 싶고, 더 해주면서도 기분이 좋다. 무 계약이기 때문이다.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소에 믿음을 동댕이치고 말썽을 부리는 자식에게는 해달라는 요구에 몇 분의 일을 해주면서도 마음이 상한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친구가 무엇인가? 나를 믿어주기 때문에 친구가 되는 것이다. 동포가 무엇인가? 서로가 서로를 믿어주기 때문에 동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불신이 엄습해 오는 이민사회, 타향살이가 그래서 더욱 서러워지는 것이다.
천국을 가는 데에도 천국 문을 여는 열쇠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영혼의 존재를 터득해 보려는 사람은 마음의 열쇠를 갖고 있고, 마음의 존재를 터득해 보려는 사람은 정신의 열쇠를 갖고 있다. 또한 행동의 존재를 파악해 보려는 양심의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양심의
존재를 제대로 지켜보려고 윤리와 도덕과 종교가 가르치는 지침서를 열쇠로 차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믿음의 열쇠, 믿음을 줄 수 있는 정신과 마음, 그리고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행동의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면 만리타향의 타향살이라도 실망을 하거나 서럽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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