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찰스 다윈은 오랜 기간 개를 관찰한 후 “개에게는 인간의 인격과 비슷한 무엇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윈의 관찰 속에는 인간에게 꼬리치는 개라고 해서 마구 다룰 수 있는 하찮은 존재는 아니라는 경고가 담겨 있다.
동물도 감정을 가지고 있음이 최근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원숭이처럼 지능이 높은 동물은 물론이고 소와 돼지를 비롯한 가축들, 심지어 거북이 같은 동물들조차 기쁨과 불안, 그리고 고통의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다양한 실험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휴머니즘의 동물학’이란 역저를 펴낸 동물행동학자 비투스 드뢰셔는 그의 책에서 아들에게 왕좌를 빼앗긴 수탉의 이유없는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막스플랑크 행동물리학 연구소에서 기르던 아우닥스라는 이름의 수탉은 몇 년간 암탉과 병아리들 위에 군림했다. 하지만 힘센 그의 아들이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그렇듯 어느 날 아들은 아버지의 왕관을 벗겨 버렸다. 왕관을 되찾으려는 몇 번의 몸부림이 허사로 돌아가고 아우닥스는 어두운 창고 뒷구석에 자리를 잡고 머리를 물조리 안에 처박은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그리곤 2주 후에 죽었다. 연구원들은 아우닥스의 죽음을 수치심에 의한 수동적 자살로 설명했다. 인간만이 감정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동물들도 다양한 감정을 겪는다.
임금님 수랏상에까지 올랐다는 맛있는 쌀의 생산지로, 또 충효의 고장으로 이름 높은 경기도 이천시가 지금 새끼돼지 한 마리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지난주 국방부 앞에서 군부대의 이천시 이전 반대데모를 갖던 일부 시민들이 새끼돼지 사지를 밧줄로 묶어 당겨서 죽이는 소위 ‘돼지 능지처참’ 퍼포먼스를 벌인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퍼포먼스에 분노한 많은 사람들은 “이천시를 면으로 강등해야 한다” “군부대를 꼭 이천으로 이전시켜야 한다”는 등 격노의 반응들을 쏟아 내고 있다. 대표적 UCC 유통망인 유투브를 통해 전세계로까지 급속히 퍼져나가면서 개고기 때문에 가뜩이나 부정적인 한국의 동물관련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사지를 밧줄에 묶인 채 버둥대며 소리 지르는 새끼돼지의 잔영이 머릿속에서 쉬 지워지지 않는다. 새끼돼지가 뭘 알겠느냐고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도축장의 동물들이 어떤 경로로 고통을 느끼게 되는지를 처음으로 밝혀낸 사람은 템플 그랜딘이라는 동물학자이다. 그랜딘은 자폐증 환자였다. 그는 자폐증 환자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동물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언어와 추상으로 세상을 읽어 내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자폐인들과 동물들은 세상을 하나의 그림으로 인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갓 도착한 도축장의 낯선 환경은 동물들에게 매우 공포스런 것이며 스트레스를 유발시킨다. 이 스트레스가 육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랜딘은 인간책임론을 제기한다. “인간이 자연상태의 동물을 가축화시켰다. 그러니 이들을 위한 자비로운 죽음을 연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차피 인간 입속으로 들어갈 고기인데 어떻게 죽이든 무슨 상관이냐는 주장은 무책임하다. 그것은 마치 어차피 죽을 사형수인데 어떤 방법으로 죽이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것과 기본 맥락이 다르지 않다. 공장화된 사육방식, 그리고 도축장에 도착하자마자 대량학살 하듯 이뤄지는 도축방식 속에는 재난이 잉태돼있다. 그 재난의 예고편을 우리는 광우병 파동을 통해 이미 한차례 목도했다.
문화비평가 제레미 리프킨은 “한 문화를 평가하는 척도는 그 사회 내의 가장 무력한 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집단적인 문화뿐 아니라 나아가 개별적인 인간의 수준을 잴 수 있는 척도가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당신보다 하찮고 힘없는 존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가 바로 당신의 수준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가축 사육과 도살이 공장화, 기업화 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최근 ‘동물복지’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일부 선진 국가들이 이를 법제화 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무력한 존재를 탐욕과 착취의 대상으로만 여길 때 그 대가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돼 있다. 동물들이 행복해야 인간도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상생의 원리. 이 깨달음이야말로 최근 몇 년새 우리가 절감하고 있는 ‘21세기적인 각성’이 아닐까 싶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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