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혼혈 중년교사 베이커 여사
하늘가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을 때마다
태평양 너머 어렴풋이 고향생각 부모생각
바다바람 드센 씨사이드 언덕, 한집, 한집 주소를 확인하며 서행하던 내 시야에 한 여인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노란 팬지꽃과 코스모스가 어우러진 길 저쪽에서 꿈인듯, 중년의 여인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단정하게 모아 묶은 머리, 검소한 옷차림,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아 주는 그녀의 모습은 엄마처럼 포근했다.
로리스 수 베이커 여사, 한국이름은 전 영수. 사람들은 이제 지천명을 훌쩍 넘겨버린 중년의 영수를 미세스 로리스 수 베이커(Larise sue Baker)라 부른다.
프리 스쿨 선생님이자 수영코치인 영수, 아니 베이커 여사는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오늘도 한국 음식을 만든다. 불고기, 김치, 잡채, 갖은 나물,…… 힘든 일이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고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켜주는 그 일이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끔씩, 어설픈 손놀림으로 나물을 무치거나 양파를 숭덩숭덩 썰다가, 무언가에 이끌린 듯 바라보는 하늘가로 붉은 노을이 내려 않을 때마다 베이커 여사는 단숨에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어린 영수로 되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갓난쟁이 영수를 7살이 될 때까지, 친딸처럼 보살펴 주던 사람들. 영수는 머뭇거림없이, 친부모가 아닌 그들을 향해 어머니, 아버지라 부른다.
창밖, 조용히 내려앉는 노을은 어린 영수였던 중년 여인의 가슴 속으로도 사무치게 내려앉고 있다. 어린 영수가 바라보던 45년 전의 노을 또한 저만치 아름다웠으리라.
영수는 1952년 1월 19일 생, 그러니까 한반도가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내리닫던 시절, 서울에서 태어났다. 영수는 자신이 태어난 곳도, 어머니의 얼굴도, 아버지의 이름도 기억에 없다. 그저, 남보다 약간 검은 피부빛과 커다란 눈망울과 곱슬머리를 제외하면,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예쁘고 착한 아이였던 영수. 그랬다, 영수는 흑인 혼혈로 태어나 버림받은 아이였다.
영수는 7살이 될 때까지 대리부모(guardian parent) 전보영씨와 전진수씨 부부, 그리고 부부의 두 아들과 함께 서울 외곽에서 살았다. 전씨 부부는 지금쯤 타계했을 터이며, 얼굴 한 쪽에 둥근 흉터가 있던 큰 오빠 전영길은 60대가, 작은 오빠 전구영은 50대 후반이 되었을 것이다.
전씨 부부는 영수에게 ‘전’이라는 성을 주었을 뿐 아니라, 피붙이도 아닌 영수를 친딸처럼 보살펴주고 사랑해주었다. 그러나, 어린 영수였음에도 엄마, 아빠라고 부르던 전씨 부부가 자신의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집이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자신의 집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홀로 버려진 아이의 본능적 감각인지도 몰랐다. 가족이 함께 외식을 가거나 소풍을 갈 때면, 영수는 언제나 집에 홀로 남겨졌다. 영수의 얼굴색과 곱슬머리 때문이었다. 영수는 홀로 남겨진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지거나, 데려가 달라고 조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철이 들기에는 너무 어린 영수였지만, 영수는 가족 외출에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도,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어리광을 피우거나 떼를 부릴 수 없는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전씨 부부가 친부모가 아님을 잘 알았던 영수는 착한 아이, 말 잘 듣는 아이가 되기 위해 몸보다 마음이 훌쩍 먼저 커 버린 ‘어른 아이’로 자라 있었다. 오빠가 이유없이 때려도 그냥 웃어 넘겼고, 어느날 갑자기 고아원에 위탁되었을 때조차 울지 못했다.
“나는 내가 부모님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았고, 언제까지나 나를 키워줄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어요. 고아원에 홀로 남기 싫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알았죠. 만약 내가 그렇게 떼를 썼다면 그분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어요.”
“집으로 데려가 달라거나 자신을 입양해 달라고 전씨 부부에게 떼라도 써보지 그랬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며 베이커 여사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전씨 부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들이 가슴 아파할 일을 차마 할 수 없었다고 말을 이었다. 영수는 그렇게 전씨 부부를 떠나 고아원에 어린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고아원 생활은 외롭고 힘들었다. 같은 처지의 혼혈 전쟁 고아들을 위한 시설이었던 고아원은 서울 변두리에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먹을 것에 주리고 사랑에 허기진 아이들이었다. 영수는 고아원 사감의 독한 매와 주린 배, 전씨 부부에 대한 외로움으로 고아원 생활을 기억한다.
“부모님이 너무 그리워 밤이면 혼자 울었죠. 다른 아이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 다투는 일조차 내게는 먼나라의 일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2년여의 고아원 생활 끝에 미국인 양부모에게 입양된 때는 그녀의 나이 9살 되던 해였다.
영수와 양아버지 베이커씨가 처음 만난 곳은 서울의 U.S.O 클럽이었다.
“고아원의 아이들이 U.S.O 클럽의 음악회에 초대받았었죠. 줄을 지어 가고 있었는데, 사감 선생이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가서는 군복을 입은 남자에게 나를 인사시켰죠. 지금의 양아버지인 그분은 나를 안아주며 ‘올드 블랙 조우’라는 노래를 불러 주었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누군가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어요.”
베이커 여사는 그때를 회상하며 밝게 웃었다.
1962년 5월, 당시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군 장교 베넌 죠셉 베이커(Vernon Joseph Baker) 와 펀 바이올렛 브라운 베이커(Fern Violet Brown Baker) 부부에게 입양된 영수는, 그들을 따라 태평양을 건너 미국땅으로 오게 되었다.
양부모 베이커(Baker) 씨의 영수에 대한 정성과 사랑은 지극했다. 양부모들은 영수에게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서의 자부심과 문화적 다양성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가르쳤다. 흑인 혼혈 고아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집채만한 고독에 휘둘리던 영수의 텅빈 가슴 속에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서의 자긍심과 기쁨들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양아버지 베이커 씨가 입양한 독일계 흑인 혼혈과 히스페닉계 흑인 혼혈인 자매들은 영수를 진정한 자매로 받아들였으며, 문화적, 인종적 다양함을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웠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죠. 그리고, 인간이란 뼛속까지 꼭 같다는 진실, 세상 그 누구도 다르다는 이유때문에 차별 받거나 고통 받아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배웠죠.”
세 자매는 아직도 일주일에 한 번 함께 모여 멕시칸 요리, 독일 요리, 한국 요리를 함께 나눔으로써 아이들 세대에게도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을 가르치고 있단다.
물설고 낯설은 미국생활이 어린 영수에게 어찌 처음부터 쉽기만 했겠는가.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은 단연 음식이었다.
“아침마다 먹던 달디단 잼과 느끼한 버터를 바른 토스트며 팬케이크가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도 않는 거예요. 스파게티니 스테이크 같은 별식들도 그렇고요. 한국에선 그렇게 먹고 싶던 고기가 그때는 왜 그렇게 싫던지, 참 우습죠.”
구수한 된장찌개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이 먹고파 죽겠더라던 베이커 여사.
9살 난 여자아이에게 낯선 미국생활의 어려움이 어디 음식 밖에 없었겠는가. 영수의 언어로 인한 고생이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친구도 사귈 수 없었고, 새로운 교과목을 따라잡기에도 역부족이었으며, 가족과의 의사소통 또한 힘들었다. 몇 번이고 좌절의 문 앞에 설 때면, 천지간에 외톨이였던 자신을 사랑과 정성을 다해 길러주는 미국의 부모님와 한국의 부모님 전씨 부부를 생각하고 입술을 앙다물었고, 넘어질 때마다 오뚜기처럼 일어섰다. 그리고, 그때마다 영수를 사랑으로 지켜주고 도와주던 양부모와 자매들이 있었기에 영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고, 결국 우등생도 될 수 있었다.
“미국의 어머니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지만, 자식들을 위해 가정교육을 철저히 하셨죠.”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어머니의 교육에 반항해 본 적이 없다는 베이커 여사. 한국에서의 그 고아의식과 착하고 좋은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자기 다짐이 언제까지고 가슴 속에 남아 삶의 중심이 되어 있더란다.
“나라고 사춘기가 왜 없었겠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부모님이 자랑스러워 하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의지같은 것이 내 마음에 항상 가득했답니다. 어릴 적부터 몸에 배어있던 그 생각 때문에 어른 아이가 되어버린 거지요. 나는 완전히 아이였던 때가 없었던 것같아요.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한 편으론 그런 마음으로 살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베이커 여사는 꼭,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피와 살을 나누어 준 부모가 아니라, 전씨 부부를 다시 보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의 양부모님뿐만 아니라, 한국의 부모님도 제 부모님이지요. 그분들이 너무 그리워요. 그리고, 나를 낳아준 모국이며 내 인생이 시작된 곳인 한국으로 돌아가 모든 것들을 정리하는 것이 내 인생의 환을 완성하는 길이라 생각해요.”
베이커 여사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커다란 동그라미 즉, 환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 전씨 부부와 오빠들을 만나고, 한국에서의 9년여의 삶을 총정리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전씨 부부에게 “감사함니다, 어머니, 아버지, 보고싶었어요”라고 꼭 말하고 싶다고 이었다.
“그런 날들이 있어요. 지는 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너무 슬픈거예요. 어린 시절도 생각나고, 한국의 부모님도 보고 싶고, 그래서 울어요. 어린 시절 들었던 것만 같은 노래를 듣게 되거나 그때에 맡아보았던 꽃 향기를 또다시 맡게 되는 어느날, 문득 어린시절로 돌아가 있는 나를 발견하지요.”
우리라고 왜 그런 날들이 없겠는가.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가을 하늘이 너무 눈부실 때 조국의 푸른 하늘이 생각나서, 아침 저녁으로 이불 속에 스며드는 한기에 조국의 가을밤이 생각나서, 그리고 노인들을 볼 때마다 고국땅에 홀로 계실 노모가 생각나서 우리 또한 눈물짓지 않는가.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던가. 베이커 여사는 전씨 부부와 고국을 정말로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