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인 술집들의 안주 매상이 크게 줄었다는 소식이다. 이유인 즉 한국 모 재벌 회장의 ‘독특한 아들 사랑법’이 더할 나위없는 안줏감으로 술꾼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외까지 보도되면서 그룹 체면이 국제적으로도 말이 아니게 된 모양인데 아들사랑도 좋지만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리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저지른 것인지 ‘지도층 인사’의 사려 없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핵심쟁점에 관한 진실은 경찰 수사가 좀 더 진행되면 세세히 드러나겠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볼 때는 ‘법보다 주먹이 훨씬 가깝다’는 미숙하면서도 오만한 의식이 초래한 사건으로 보인다. 아들을 때린 것으로 추정되는 청년에게 “내 아들 눈을 때렸으니 너도 눈을 맞아라”며 직접 눈두덩이를 가격하고 문제의 주점에서는 폭행 당사자를 무릎 꿇린 후 아들에게 “맞은 만큼 때리라”고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밖까지 ‘퍽 퍽’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이런 응징법은 구약성경에 언급돼 있지만 기원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간단히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전해지지만 원문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손에는 손, 발에는 발, 화상에는 화상, 타박상에는 타박상으로 보상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길게 언급돼 있다. 어떤 해를 당하게 되면 같은 해로 갚아 주어야 한다는 이른바 ‘동해 복수법’이다. 함무라비의 규정은 대표적인 원시 형벌법이다.
비폭력 운동을 주창했던 마하트마 간디는 “모든 이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실천한다면 세상은 온통 장님과 이빨 빠진 사람들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21세기에 ‘선진화’와 ‘글로벌 도약’을 힘차게 부르짖어온 재벌 회장이 검은 장갑 끼고 원시적 형태의 복수에 나섰다니 선뜻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어느 아버지의 빗나간 부정으로만 보아 넘기기 힘든 이유다.
‘회장님’의 그룹에서 낸 보도자료 내용도 실소를 자아낸다. 그룹 내에서 황제처럼 군림해 온 회장을 두둔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그의 부정은 이 시대에 사라진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화”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은 코미디라기보다 오히려 비극에 가깝다. 대한민국 모든 아버지들이 이런 식으로 아들 사랑을 실천하고 나선다면 성한 사람이 하나도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 대한민국 재벌그룹 내의 분위기가 어떤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평소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사람도 자식문제에만 이르면 건전한 판단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기업인들과 유명한 종교인들 가운데 특히 그런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 자신들이 성취한 것을 자식들이 맘껏 향유토록 해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수 있다.
20세기 초 미국사회도 신흥부자들이 대거 탄생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많이 불거졌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부와 명예를 물려받은 아이들의 도덕적 해이가 극심했던 모양이다. 한 사회학자는 이런 풍조를 보고 부유함을 의미하는 ‘어플루언스’(Affuluence)와 유행성 독감을 뜻하는 ‘인플루엔자’(Influenza)를 합해 ‘어플루엔자’(Affuluenza), 즉 ‘풍요가 부른 질병’이라고 이름 붙였다.
‘어플루엔자’는 절제와 훈육이 수반되지 않은 자녀사랑, 특히 돈과 권력을 가진 계층의 무분별한 자녀사랑은 오히려 치명적인 독소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해 주고 있다. 스물두살된 아들이 벌인 싸움에 아버지가 복수한답시고 폭력을 들고 나서는 태도에서는 절제와 훈육을 찾아볼 수 없다.
아버지의 바람직한 역할은 아들이 독립적인 개체로 건강히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데 있다. 아들이 부모로부터 분화된 ‘나’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자꾸 막다 보면 아들은 인격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유아성을 벗어나기 힘들다. 현대사회를 흔히 ‘아버지의 수염이 상실된 시대’로 비유한다. 과거 아버지의 수염은 권위와 엄격함을 상징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런 수염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는 탄식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절제가 결여된 아버지의 부정은 아들의 성장을 돕기보다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비뚤어진 사랑으로 나타나곤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아버지를 일찍 잃었다. 그는 훗날 “적당한 시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나를 자유롭게 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버지 부재’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일찌감치 세상에 독립적 존재로 던져짐으로써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성인인 아들싸움에 아버지가 과잉 개입하는 ‘부자관계’는 그리 건강하게만 보이지 않는다. 절제 없는 사랑은 아들뿐 아니라 자칫 자신의 발등을 찍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 사건은 잘 보여주고 있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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