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장 폴랑의 소설에 등장하는 한 영국인은 프랑스 칼레 항구에 첫 발을 내디디기 전까지는 프랑스인을 본 적이 없었다. 항구에 내려서면서 그가 처음 본 사람은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자였다. 이 여자를 보면서 영국인은 생각한다. “흠, 프랑스 여자들은 머리칼이 다 붉구만.”
소설 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TV에서 “몇몇 사람이 오랫동안 정부 웰페어를 허위로 타내다가 적발됐다”는 보도를 탑 뉴스로 봤다고 치자. 이런 뉴스를 대하면 사람들은 흔히 “웰페어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는 거짓 수혜자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은 극소수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특히 뉴스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사건에 관한 것일 경우 그 한 가지 사례를 통해 우리의 관점을 단순화 시켜 버리는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이런 현상을 어둠 속에서 한곳에 조명이 비춰질 때 그 잔영이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는 것에 빗대 ‘스팟라이트 효과’라고 부른다.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은 우리가 대상 하나하나를 개별적인 것으로 보고 해석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간단한 트릭을 작동시킨다. ‘성급한 일반화’가 그것으로, 한 두 사건 혹은 한 두 사람에게서 받은 인상을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의 일상과 사고는 이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와 함정에 의해 크게 지배된다.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이것처럼 편한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런 성향을 한층 더 부채질 한다. 어떤 사건이 나면 언론이 먼저 나서 단순화, 일반화 시켜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수동적인 뉴스 수용자들은 이런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성급한 일반화’는 더욱 위험한 함정이 돼 버린다.
개인과 문화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이런 경향은 있다. 그런데 지난주 발생한 버지니아텍 참사는 ‘누구에게나 이런 경향이 있다’는 본질론 못지않게 ‘정도의 차이’ 또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임을 일깨워 줬다.
사건 후 한국 언론들은 조승희군이 어릴 때 미국에 건너 온 점을 부각시키며 “1.5세가 저지른 참극” “부모의 성공강박증이 부른 참사” 등으로 마치 조군이 1.5세 이민가정 아이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양 색칠을 해 댔다. 조군이 1.5세‘로서’ 겪었던 고통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1.5세‘였기 때문에’ 이번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물론 많은 1.5세들이 갈등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1세는 1세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2세들은 2세들이기에 짊어지는 나름의 고민이 있다.
한인사회는 많은 유형·무형의 자산을 갖고 있다. 근면성이라는 가치관, 눈부신 경제력과 조금씩 쌓아가고 있는 정치력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정말 소중한 자산의 하나가 바로 1.5세라고 생각한다. 두 문화 사이에 끼어 자란 1.5세들은 한인사회 모든 분야에서 세대와 세대, 한인사회와 주류사회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런데도 단정적인 기사를 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일부 한국 언론들은 버지니아텍 보도에서 무책임한 일반화를 남발했다. 이런 태도는 참사를 ‘한국인’이 아닌 조승희라는 ‘개인’에 의해 저질러진 일로 이해하고 있는 미국 언론, 그리고 대다수 미국인들과 사뭇 비교된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언론만 그런 게 아니라는 점이다. 참사 발생 후 일부 한국 관료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참회’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굴신에 가까운 분위기가 고개를 들었다. 이런 과민반응은 역설적으로 한국인들이 그만큼 ‘성급한 일반화’의 함정에 깊이 빠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피해자였다면 싸잡아 매도했을 테니까 미국인들도 그럴 것”이라는 예단이 작용한 것이다.
이런 경향이 강한 사회일수록 편견이 쉽게 자란다. 경제력, 출신 지역, 학력, 가정환경 등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견해의 대부분은 ‘성급한 일반화’의 퇴적물로 보면 거의 틀림없다. 이런 마음의 트릭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사람과 상황을 개별적으로 보려는 의식적인 노력과 훈련, 그리고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상황과 인간 자체는 중립적”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을 놓지 않아야 한다. 이민 1세이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뛰어 성공한 사람이 있는 반면 1세이기 때문에 좌절해 실패한 사람도 있듯이 말이다. 써 놓고 보니 이번 칼럼이야말로 ‘성급한 일반화’의 전형이 돼 버린 것 같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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