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부지불식간이다. “알지, 한국인이라는 거…. 괜찮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대학이다. 버지니아텍 참사의 범인이 한국인으로 밝혀지자 보인 첫 반응이었다.
사실 무관심했었다. 브레이크 뉴스로 전해진다. 총격사건이다. 대학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어느 대학인가. 버지니아텍. 먼 곳이군. 이내 관심도 멀어진다. 희생자가 자꾸 는다. 또 곧 잊혀 지겠지…. 연중행사 같이 벌어지는 사건이니까.
여전히 ‘남의 일’이었다. ‘조승희’라는 이름이 화면에 뜬다. 한인 대학생이 범인이라는 거다. 순간 머리가 띵해진다. 그리고 바로 잡아든 게 전화다. 대학 기숙사에 있는 딸이 걱정돼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무관심 정도가 아니었다. 무감각이라는 편이 맞다. 그런데 한인이 범인으로 알려지자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전율이 돈다고 할 정도다. 그렇다고 희생된 미국 대학생들이 먼저 떠오른 것도 아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 부모들도 아니다. 내 혈육이고, 한인들이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조승희 학생의 부모다. 힘든 이민생활 끝에 그런대로 아이들을 모두 좋은 대학에 진학시켰다. 나름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고 할까. 그런데 그 아들이….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겠지. 그 아픔이 절절히 전해지는 듯해서다.
그나저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가해자는 분명 한인 학생이다. 그가 벌인 광란의 살인극으로 전 미국이 비탄에 빠져 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걱정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마이너리티 콤플렉스 탓이다. LA타임스였나. 버지니아텍 총기난사 사건을 통해 한인사회가 보이고 있는 충격과 수치감을 전하면서 그 복잡한 감정은 소수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라고 했던 게.
흑인계는 흑인계대로, 아랍계는 아랍계대로 저마다 마음을 졸였다고 한다. ‘범인이 혹시…’하는 심정에서. 그러다가 한국계임이 밝혀지자 안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자책이 따랐다는 것이다. 그 안도하는 심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틀린 지적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 당혹감이, 그 수치감이 여간 큰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뭘까. ‘끼리끼리’ 의식. 민족주의. 이런 단어들이 불현듯 떠올려진다.
“민족주의로 먹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 얼마 전 한국에서 벌어진 논란이다. 한국 사회 일각의 좁고 넘치는 민족주의에 대한 지적으로, 과잉 민족주의는 독이 된다는 경고였다.
민족주의는 배타의 성벽을 쌓는다. 그 극단의 결과는 이분적 사고방식이다. 모든 것이 ‘우리’ 아니면 ‘남’이다. 그 ‘우리’가 아닌 ‘남’에 대해서는 가차가 없다.
이 배타적 민족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피해의식(victim mind)이다. 수십 차례의 외침에, 식민 지배를 당했다. 그리고 분단 상태에 있다. 그 과정에 형성된 게 한국의 민족주의이기 때문이다.
그 과잉 민족주의의 기억소자가 미주 한인의 DNA에도 저장돼 있는 게 아닐까. 남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다. 내 이야기다. 무관심했었다. 그러다 화들짝 놀란다. 한인이 범인이란 소식에. 뭘 말하나. 내 일과 남의 일 이분법적으로 확연히 구분된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항상 피해자의 입장에만 있었다. 그 입장이 바뀌면서 몹시 당황해하고 있는 것이다.
참극이 발생한지 벌써 한 주다. 여전히 참담한 심정이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애써 이 사건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본다. 무엇일까. ‘나의 모습’을 정확히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 아니었을까. 스스로의 벽에 갇혀 ‘우리’와 ‘그들’을 구별해 살고 있는 일그러진 나의 모습을.
그 모습이 자꾸 부끄러워진다. “지금은 인종, 신념, 계층을 넘어 폭력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할 때”라며 오히려 한인들을 감싸는 버지니아텍 학생들의 감사편지를 대하면서. 그리고 어디까지나 잘못된 총기문화의 병리적 현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미국사회의 성숙함을 새삼 발견하면서.
“괜찮아요. 아무도 코리안 탓을 안 해요.” 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딸의 목소리다. 그 날 딸과의 전화는 이렇게 끝났다.
다시 전화해야겠다. 그리고 말해야겠다. 전혀 걱정하지 말고 맘껏 대학 생활을 즐기라고. 또 말해야겠다. 함께 기도하자고. 이 땅을 향해 진정으로 기도하자고. 진정한 기도만이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라고 믿기에.
sechok@koreatimes.com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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