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비하 논란을 일으켰던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지난 1993년작 영화 ‘폴링 다운’은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는 샌타모니카 프리웨이를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교통체증 때문에 프리웨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다. 에어컨은 말을 듣지 않고 시간이 흘러도 자동차는 여전히 제자리이다. 군수업체에서 일하다 한달 전 실직한 주인공은 딸아이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이혼한 아내 집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비 오듯 땀 흘리며 자동차 안에 앉아 있기 여러 시간. 주인공은 서서히 자제력을 잃어간다. 걸어서 아내 집에 가기로 하고 자동차를 박차고 나온다.
‘폴링 다운’은 주인공이 프리웨이에서 걸어 나와 아내 집에 다다르는 과정에 그의 좌절감을 증폭시키는 갖가지 상황을 배치하고 있다. 공중전화 거는데 필요한 동전을 바꿔주지 않는 한인 업주, 5분 늦었다고 아침메뉴 팔기를 거부하는 버거킹 매니저, 통행세를 요구하는 히스패닉 갱들, 여자 가슴 키워주는 것으로 엄청난 저택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성형외과 의사…. 주인공은 한인가게에서 야구방망이를 휘두르고 구두가게에서는 네오 나치주의자를 살해한다. 또 네오 나치주의자에게서 빼앗은 바주카포로 길거리 공사현장을 박살내는 등 치솟는 좌절감을 폭력으로 분출시킨다.
영화의 마지막은 출동한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 주인공은 “다시 한번 삶의 기회가 있다”며 설득하는 경찰에 이렇게 대꾸한다. “나는 조국을 위해 미사일을 만들었지만 성형외과 의사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으며 결국 돌아온 것은 실직뿐이고 이제는 딸아이조차 만날 수 없다.” 그리고는 경찰총에 맞아 숨진다.
‘폴링 다운’은 분노의 문제를 잘 다루고 있다. 분노의 폭력적 표출은 단 한번의 좌절이나 상처에 의해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다. 오랜기간 마음속에 쌓여 있던 좌절감과 분노가 성냥불 같은 상황에 의해 점화되면서 폭발하는 것이다.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았다고 절망해 사람을 30명씩이나 죽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서서히 체내에 독성이 축적되듯 마음속에 분노가 쌓여 있다면 이런 작은 좌절도 큰 폭력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방아쇠를 당기는 것에 비유한다. 분노는 화약과 같다. 마음속의 화약에 방아쇠를 당기면 그대로 폭발해 버린다. 방아쇠 역할을 하는 것은 보통 실직, 실연과 같은 개인적 좌절이다.
16일 버지니아텍에서 한인학생에 의한 대참극이 발생했다. 범인 조승희군이 어떤 동기에서 이같은 끔직한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수사가 끝나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학생이 오랜 기간 마음속에 분노와 좌절을 쌓아왔다는 사실이다.
조군이 다녔던 학교 동창생들 가운데 그의 신상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철저한 외톨이였음을 보여준다. 한 고교 동창생은 “학교 다닐 때 친구들로부터 왕따 당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한다. 그가 좌절하고 분노할수록 친구들과는 더욱 멀어졌을 것이다. 여자친구의 결별선언이 폭발성이 가득한 이런 조군 마음에 방아쇠를 당긴 듯하다.
왕따 당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감정은 ‘무기력’과 ‘복수심’이다. 현실세계에서 무기력한 이들은 종종 ‘달콤한 복수’를 꿈꾼다. 그런 ‘달콤한 복수’의 극단적인 형태가 이번 참사와 같은 대량학살극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총구 앞에서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것을 확인하면서 이들은 순간적이나마 자신의 파워를 확인한다.
1990년대에 ‘분노가 죽인다’(Anger Kills)라는 제목의 책이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분노의 감정이 건강을 해친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인데 분노가 건강뿐 아니라 애꿎은 생명까지 앗아가는 것을 보니 제목 하나는 기막히게 지은 것 같다.
미국인들의 20% 정도가 분노조절에 애를 먹는다는 보고가 있다. 한인들의 비율도 비슷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분노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것을 어떻게 조절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내부압력이 엄청난 압력밥솥이 폭발하지 않는 것은 그때그때 증기를 밖으로 뿜어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속의 압력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방법이 되었든 뿜어냄의 기능을 원활히 작동시켜야 한다.
에머슨은 “우리는 서로 다른 온도에서 끓는다”고 말했다. 당신의 끓는 온도는 몇도인가. 버지니아텍 참사는 적절히 배출되지 못하는 분노의 위험성과 함께 분노 관리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런 무분별한 범죄를 접할 때마다 산다는 게 지뢰밭을 지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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