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바이벌 쿡아일래드 편에서 경쟁자들과 게임을 앞두고 출발선에 서 있는 권 율씨.
아름다운 르네상스맨
“이상주의자 꿈꾼다”
사람의 얼굴은, 기록한다. 다만 은닉에 능한 얼굴이 있고, 내보이기를 기꺼워하는 얼굴이 있을 따름이다. 어느새 셀러브레티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유명해진 율 권(권율이라는 한국식 배열보다는 율 권이라는 미국식 이름이 더 친근한 것은 서바이벌의 기억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까)은 삶의 기억을 거침 없이 드러내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그가 거쳐온 세월을 상상하도록 충동한다. 장난꾸러기 소년, 대범한 이상주의자, 아름다움과 젊음을 부지런히 시샘하는 이제 막 청춘을 건넌 삼십대, 불의를 용납지 않는 대쪽 선비가 모두 거기 있다. 또 얼굴이 새기는 시간은 과거만이 아니어서 아버지의 그것을 닮아 가는 양미간에는 아직 오지 않은 나이가 깃들 자리를 가늠하고 있다. 한인이 참가했다는 것만으로 시선을 모았던 지난해 서바이벌 쿡 아일랜드편에서 자신도 예상 못했다는 우승을 거머쥔 권율(32)씨를 지난 5일 한인타운 카페에서 만났다.
지난 해 서바이벌 쿡 아일랜드편 우승자인 권율씨. 코리안 아메리칸의 잘못된 편견에 대한 도전이 출전 계기가 됐다는 그는 우승 후 골수암 기증 캠페인과 위안부 결의안 통과 로비 등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코리안 아메리칸 잘못된 편견 깨려 출전
지원자 5만명중 최종 20명 뽑혀 끝내 우승
팀웍 이끈 탁월한 리더십 인종떠난 영웅으로
■서바이벌, 너는 내 운명
5만명의 지원자 중 출연자 20명안에 드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터. 게다가 애초부터 기를 쓰고 출연에 매달린 것도 아니었다.
“처음 친구가 대신 응모해주겠다고 할 땐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예선을 통과하면서부터는 진지해졌죠. 어차피 출연하는 거 지금껏 미국사회에 뿌리내려 있는 부정적인 코리안 아메리칸들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었습니다. 사실 한인하면 많은 미국인들이 쿵푸 사범이나 너드(nerd)만을 생각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긍정적이고 매력적인 코리안 아메리칸 이미지를 미디어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열의는 대단했지만 율의 부모는 그의 서바이벌 출연이 마뜩치 않았다. 공부 잘하고 잘 나가는 막내아들이 뭐 부족한 게 있다고 TV에 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처음엔 반대했다고.
특히 서울 공대를 졸업하고 70년대 유학와 지금껏 정유회사 셰브론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부친 권영현씨는 아들의 출연을 극구 말렸다.
“아버지는 서바이벌이 말 그대로 무인도에 들어가 사람들이 죽고 정말 살아오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알고 계셨어요.(웃음) 워낙 TV를 즐기지도 않고, 1세 한인들이 그렇듯 TV 쇼에 별로 좋은 점수를 주지 않잖아요?”
오디션 통과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식이요법과 운동에 돌입했다. 건장하고 다부진 체격을 가진 다른 인종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몸을 만들기 위해 TV 출연 2주 전부터는 거의 피트니스 센터에서 살다시피 했단다. 그리고 그의 이런 노력은 첫회 때부터 빛을 발했다.
TV 속 율은 모델 뺨치는 탄탄한 근육과 비상한 두뇌회전, 게다가 팀원을 배려하는 남다른 친절함까지 시청자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게다가 탁월한 리더십에 친절함까지 갖춰 덕분에 그는 촬영동안 ‘대부’(god father)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렇다고 그가 게임의 승패에 무관심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일단 처음부터 진 빼면서 모든 게임에 1등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랬다간 팀원들에겐 미운털이 박힐테고 금방 퇴출될 게 뻔하잖아요? 그래서 처음엔 승부 욕보다는 팀웍을 중요시 여겼고 마지막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전략은 통했다. 팀원들은 팀의 우승에 기여하지만 그렇다고 엄청 쎄 보이지도 않는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덕분에 그는 끝까지 갔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극구 운이 따라 이겼다고 했지만 그의 출연분을 본 이들이라면 그가 얼마나 침착하고 현명하게 게임에 임했는지를 알고 있을 터이다. 서바이벌은 분명 그의 운명, 맞다.
■이 남자가 사는 법
이 남자, 참 진지하다.
그래서 어느 질문 하나에도 건성인 법이 없다. 어느 토픽 하나 무심코 지나치는 법이 없다. 최선을 다해, 솔직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아 오히려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 어느새 소년 같은 장난기와 유머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도 지녔다. 진지한가 싶으면 유쾌하고 정치적이다 싶으면 어느새 경박하지 않은 박식함으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재주 아닌 재주를 지녔다. 이 남자.
아마도 이런 부드러운 카리스마 때문인지, 아니면 화려한 이력 때문이지 그는 최근 연예 전문 프로그램인 엑스트라(Extra)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싱글남 탑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셨죠 (웃음). 서바이벌 우승 때보다 더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도 결혼해 가정을 꾸리길 바라시는데 현재로서는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아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이미 그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력있는 엔지니어가 목표였던 그가 인생항로를 확 틀어 법을 공부하고 사회운동에 힘을 기울이는 것은 그의 절친한 친구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스탠포드 시절 중·고등학교도 함께 다닌 절친한 중국계 친구가 백혈명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우여곡절 끝 기증자를 찾았지만 그땐 너무 늦었다. 친구는 죽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엔지니어가 꿈이었던 이 영민한 청년은 그때부터 남과 더불어 사는 커뮤니티를 꿈꾸게 된다. 그래서 법도 공부하게 됐고 변호사도 됐고,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덕분엔 부모님께 참 많이도 혼나고 걱정도 끼쳐드렸죠. 좋은 직장에 많은 연봉을 마다하고 늘 새로운 일을 찾는 막내아들이 왜 근심이 아니었겠어요. 제발 좀 정착해 살라고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웃음)”
여기서 나고자란 2세가 뭐 그리 부모 눈치를 볼까 싶지만 그는 참 다정다감한 가족 지상주의자다. 게다가 이민와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을 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유난하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고교시절 받은 장학금 2,000달러로 어머니를 한국에 보내드린 것을 꼽을 만큼 율은 심성 좋고 사랑스런 막내아들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10년. 강산이 한번 변하는 세월이지만 그는 아직도 친구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 싶다. 아직도 빚진 심정. 늘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갈증이 삶의 원동력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난 2월엔 아시안아 메리칸 기증자 프로그램이 주최한 기증자 확대 캠페인에 5만달러를 선뜻 내놓기도 했다.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라 부르는 서른 둘의 이 사내는 아직도 현실주의자가 되지 못했다.
10년째 골수암 기증 홍보일은 물론 최근엔 종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 로비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지금 아마도 수많은 편견과의 한판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정치쪽에 관심이 많았는데 서바이벌 이후 미디어 쪽에도 관심이 큽니다. 미디어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니까요. 제가 세상을 바꾸리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다만 작은 힘이 미국에 사는 소수계에, 코리안 아메리칸들의 권익신장에 쓰여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 남자, 말하는 폼새도 삶의 리듬도 4분의 3박자 왈츠 같다. 몸 안에 저만의 메트로놈을 숨긴채 그에 맞춰 우아하고 아름답게 춤을 추는 듯 하다.
지·덕·체를 모두 갖춘 르네상스 맨으로 살고 싶다는 푸르른 마음을 지닌 사내. 이제 막 창공으로 비상하는 뒷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 권율은 누구?
▲1975년 2월 뉴욕 퀸즈 출생
▲1980년 캘리포니아 콩코드로 이주
▲월넛 크릭 노스게이트 고교 졸업, 졸업생 대표 연설(valedictorian)
▲스탠포드 대 졸업(컴퓨터 사이언스 전공)
▲예일 법대 졸업
▲워싱턴 DC, 가주 변호사 자격증 취득
▲연방법원 서기
▲리버만 상원의원 법률담당 보좌관
▲맥킨지 컨설턴트
▲구글 근무
▲ 2006년 서바이벌 쿡 아일랜드편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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