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아공영권’-. 신세대에게는 다소 낯선 용어다. 그 말이 그런데 요즘 미국에서 심심치 않게 들린다.
과거 군국주의 일본이 침략의 명분을 얼버무린 슬로건이 대동아공영권이다. 이 전근대적인 슬로건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거다. 그러나 일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중국이다.
군비증강에 혈안이 돼있다.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서 미국의 이해에 도전하고 있다. 그 중국을 빗대 ‘신(新)대동아공영권’론이 워싱턴 일각에서 새삼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과장의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도 들린다. ‘동아시아에서의 파워의 변환이 가져올 결과를 미국은 예의주시하고 있고, 또 그만큼 우려하고 있다’고.
파워의 변화는 전쟁을 불러온다. 동아시아의 역사도 예외가 아니다. 오랜 세월 중국은 동아시아의 패자였다. 그 기상도에 변화가 생긴다. 그러면 뒤따르는 게 전쟁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그랬다. 한동안 도전세력은 일본이었다. 임진왜란, 청일전쟁이 그 결과다.
그 위치가, 그 역할이 최근 들어 뒤바뀌었다. 중국이 새로운 군사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옛 패권주의로의 꿈을 되살리고 있다. 그 중국의 대두가 가져올 상황에 워싱턴은 우려의 눈길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은 그 말 자체가 한국인에게 악몽이다. 패권주의의 동의어로, 그 다툼에 항상 피해를 입어왔다. 현재의 한반도 상황도 따지고 보면 청일전쟁에서부터 시작된 동아시아 지역 패권다툼의 후과(後果)다.
대동아공영권 얘기가 길어진 건 다름 아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했던가. 한미 양국의 FTA(자유무역협정)체결과 관련해 한국인의 숙명적 안보관에 뭔가 큰 변화의 패러다임이 엿보이는 듯해서다.
관련해 주목해야 할 인물은 아무래도 전 미국무부 부장관 로버트 졸릭 같다. 패러다임 변화에 단초를 제공한 당사자로 보여서다.
“미국의 무역정책은 우리의 폭 넓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 안보적 정책과 연결돼 있다.” 9.11사태가 난지 얼마 후 그가 미국의 국제경제연구소에서 한 연설 내용이다. 무역전쟁을 명시적으로 테러전쟁의 일환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후 미국의 무역정책은 한 가지 뚜렷한 흐름을 보인다. 미국의 FTA체결에 가속도가 붙은 것이다. 2002년 요르단을 필두로 칠레, 싱가포르, 중미 5개국에, 호주, 모로코, 도미니카, 바레인, 오만 등과 잇달아 FTA협정을 맺었다.
경제적으로 보면 그리 중요한 나라들이 아니다. 그런데 왜 서둘러 FTA를 체결했나. 경제보다는 안보적 논리에서다. 그 나라 나라들이 하나간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말하자면 FTA를 통해 종전의 군사동맹보다 한 차원 높은 안보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의 FTA체결을 가장 먼저 제의한 사람이 졸릭이다. 그리고 또 한반도문제와 관련해 미국무부 부장관으로서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중국은 북한핵문제에 대해 당사자로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미국은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도 좋고, 중국에도 좋은 한반도 장래 시나리오를 중국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등등.
그의 이 같은 심장한 발언들과 행보를 종합하면 한 가지 그림이 떠오른다. 부시 행정부, 더 나가 미국이 바라보는 ‘파워 변환기의 동아시아관’과 그 대응 전략이다.
미국과 북한 간 대화의 물꼬를 튼 2.13 합의가 이루어진 직후 졸릭은 월 스트릿 저널에 기고를 했다. 일종의 2.13 합의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주목할 부분은 이미 1년 전에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의견을 부시는 중국과 일본 지도자와 조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문제에 있어 냉전은 물론이고 2차 대전과, 한 세기 전의 일로전쟁, 더 거슬러 올라가 청일전쟁의 고통스런 유산을 극복하는 전략적인 안을 부시행정부는 마련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한미 양국 간의 FTA체결이 성사됐다.
무엇을 말하나. 미국은 오랫 동안 면밀한 계산을 해왔다. 그리고 동북아 사태와 관련해 전략적 선택을 했다는 것이 될 것 같다. 큰 그림은 중국견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내의 친북· 친중 노선에 제동을 걸어, 끌어내야 한다. 한 차원 높아진 새로운 동맹체제로.
말하자면 ‘중국 버전의 대동아공영권’의 버전에 강력한 태클을 건 것이다. 그럼으로써 동아시아지역에서 미국중심의 새로운 경제안보질서를 구축하고 나선 것이다.
“한미 간 FTA체결은 경제적 목적보다 북한 핵 위협, 동북아 평화체제 등 안보측면에서 더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누가 한 말이던가. 당황하는 중국의 모습에서 그 말의 무게가 새삼 느껴진다.
sechok@koreatimes.com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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