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상 동부에 장기 출장 중인 한 지인이 더그우드 사진을 보내주었다. 네 조각 하얀 꽃잎들이 십자 모양을 이루는 이 나무는 미국 북동부 지방에 많은 수종이다.
남가주에서는 볼 수 없던 더그우드를 사진으로 대하자 가슴 싸- 한 그리움과 함께 코끝에 봄 향기가 감돌았다. 20여년전 4월 처음 이민왔을 때 동부의 우리집 뒷마당에도 더그우드가 있었다.
부활절 즈음해서 꽃이 만발하는 더그우드에는 전설이 있다. 고대 중동에서 죄인을 처형할 때 쓰던 십자가의 재목이 이 나무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사람 키를 웃돌 정도의 아담한 나무이지만 2000년 전에는 떡갈나무처럼 크고 우람했다고 한다.
사람을 매달만큼 튼튼한 그 나무 십자가 위에서 예수도 처형을 당하셨다. 나무는 자신이 그처럼 잔인한 용도로 쓰인 데 대해 몹시 비통해했고 예수는, 나무에 못 박힌 채, 나무를 위로하셨다.
“인자의 고통받음에 그토록 애통해하니 다시는 크게 자라서 십자가로 쓰이는 일이 없으리라”
이후 더그우드는 키가 작아지고 가지들은 구불구불 휘어지며 십자가 모양의 꽃들이 피어났다는 내용이다. 하얀 꽃잎의 가장자리를 자세히 보면 가운데가 오목 들어가고 붉은 색이 감도는데 그것은 피 묻은 못 자국의 상징이라고 한다.
부활절이 있는 초봄이면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신생’에 대한 갈망이 있다. 겨울동안 죽은 듯 묻혀있던 씨앗들이 싹을 내고, 나목에서 잎이 돋고 꽃이 피는 생명의 계절을 맞으면 “나도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자연스럽다.
삶은 질 낮은 개솔린 자동차 같다는 생각이 때로 든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의미 있고 기쁨에 차서 그날 분의 연료, 24시간이 완전연소 된다면 ‘신생’의 목마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의 삶은 불완전 연소의 반복이어서 살아온 만큼씩 후회라는 찌꺼기를 남긴다.
그대로 가면 자동차는 시커먼 매연 뿜어대며 덜덜 거리는 고물차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습관의 노예가 되어, 익숙함이 주는 안락함에 중독이 되어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우리는 대개 이어간다.
끝이 빤히 보이는 데도 왜 우리는 새로워지지 못할까. 종교적으로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현실적로는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목 타도록 간절한데도 왜 실천은 안 될까.
며칠 전에 만난 한 후배는 진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갓 마흔을 넘긴 그는 현재의 직장에서 보람을 느낄 수 없다며 새 길을 찾고 싶다고 했다. 전혀 다른 분야를 공부해서 새로운 전문 직종에 종사하려는 것이 그의 희망사항이었다.
“몇 년 전에도 같은 생각을 했었어요. 현실이 걸려서 미루다 보니 흐지부지 되고 말았지요. 그때 독하게 마음먹고 실천을 했다면 지금쯤은 새 직업을 갖고 있을 텐데…”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을 때 가족의 생계문제, 뒤늦게 공부해야하는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 … 이런 저런 걱정하며 어물어물 하는 사이 세월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부활절이면 생각나는 어른용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트리나 파울루스 작)은 보다 나은 삶을 찾아가는 애벌레들의 이야기이다. 애벌레가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나비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만 애벌레는 모른다.
주인공 애벌레는 고치 속에 매달린 늙은 애벌레로부터 나비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 듣고 기절할 듯이 놀란다. 땅을 기는 자신이 하늘을 나는 눈부신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될지를 묻는 그에게 늙은 애벌레는 말한다.
“그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날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해야 하지”
애벌레로서의 죽음인 고치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절에 만개하는 더그우드는 사실은 죽음의 상징이다. 예수도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던 ‘쓴 잔’의 상징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에게 가장 ‘쓴 잔’인 죽음을 받아들이자 부활이라는 기적이 나타난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부활의 전제조건은 죽음이다.
‘신생’ 은 새로워지고 싶은 간절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현실의 ‘쓴 잔’을 받아 마시는 용기가 먼저 필요하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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