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주필)
한미자유무역협정의 타결이라는 엄청난 충격이 몰고 온 또 하나의 충격은 노무현대통령의 돌변이었다. 이로 인해 그에게 비판적이었던 보수진영이 찬사를 쏟아내는가 하면 그의 지지기반이었던 진보진영이 등을 돌리고 있다. 한미 FTA 타결 직후 한나라당에서는 “대통령 결단을 높이 평가한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대통령답더라, 잘 하더라”고 칭찬했다. 노대통령 탄핵의 주역인 조순형 의원도 “대통령의 소신과 결단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그에 대한 비판 일색이었던 언론도 칭찬으로 돌아섰다. 이런 칭찬에 대해 청와대쪽에서는 “어리둥절하다”고 했다. 반면에 진보진영에서는 “국가의 자존을 훼손하고 중산층과 서민을 배신한 행위”라
고 몰아부쳤다.
사실 노대통령이 이번 한미 FTA 타결에서 보여준 태도는 의외였다. 한국에서는 어느 사이에 반미정서가 사회의 밑바닥에 널이 깔려있었다. 여당과 시민단체들은 그 반미정서를 기반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특히 한미 FTA는 농민과 일부 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반미정서의 기폭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당 조차도 표를 잃을까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노대통령이 앞장서서 밀어부쳤다. 그것도 대통령의 기반인 진보세력이 맹렬히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랬다. 그 결과는 어떤가. 국민들은 “노대통령, 정말 잘했어요” 하고 지지를 보냈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하루만에 10%가 올라 30%가 되었다.
노대통령이 이처럼 자기 진영을 버리고 반대편에 서서 한미 FTA 를 타결시킴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받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그가 말한 내용에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그가 좥먹고 사는 문제좦를 해결하겠다고 했고 둘째는 좥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면서좦 이 문제를 타결시키겠다고 했다는 점이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잘 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는 박정희대통령은 일제시대에 관동군 장교로 복무했고 해방 후에는 좌익운동에 관련됐고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전복시켰으며 유신독재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하는 등 많은 과오가 있다. 그러나 그는 경제를 일으켜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 모든 허물들이 덮어지고 잘 한 대통령이란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이처럼 먹고 사는 문제는 개인이나 국가나 가장 큰 문제이다. 보수니 진보니, 우익이니 좌익이니, 또 누구를 대통령으로 밀고 안 밀고 하는 모든 정치싸움이 국민을 잘 먹고 잘 살게 하고 나라를 더 부강하게 한다는 목적을 명분으로 삼고 있다. 즉 먹고 사는 문제가 최우선 과제라는 말이다. 남북정상회담이나 심지어 남북통일도 먹고 사는 문제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노대통령이 이 먹고 사는 문제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존 F. 케네디는 기자 시절 ‘용감한 사람들’이라는 책을 써서 미국 언론인에게 수여되는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책 속에서 유권자들의 표나 압력단체에 굴복하지 않고 미국의 국익과 사회정의를 위해 정치적 투쟁을 한 미국 정치인들에 대해 썼다. 그들이야말로 정상배가 아닌 진정한 경세가이며 용기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노대통령이 여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 FTA의 타결에 앞장서면서 정치적 손해를 감수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국민으로부터의 지지가 그 손해를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노대통령의 진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가 한미 FTA를 진심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FTA를 강하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여 민심을 끌어 모음으로써 진보진영 내에서 추락한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의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말하자면 ‘이이제이’, 즉 적의 힘으로 적을 제압한다는 말인데 노대통령이 국민적 인기를 바탕으로 진보진영에 발판을 확대하면 개헌 추진,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입지를 넓혀 그가 원하는 대선후계 구도를 구축해 나갈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렇다면 한미 FTA는 국민을 속이고 보수 진영을 허물기 위한 좥트로이 목마좦의 구실만 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번 한미 FTA를 계기로 모든 사람은 대통령이 진정한 대통령이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보았다. 노대통령은 취임 이후 많은 국민들로부터 진정한 대통령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어쩌다가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는지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그가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자 대통령다운 대통령이란 찬사가 나왔다.
그렇다. 노대통령이 아무리 세력을 확장하려고 애쓰고 아무리 큰 업적을 남기려고 애써도 국민들은 못난 대통령이라고 손가락질만 할 것이다. 그가 애써서 후계자를 세운다 해도 그의 퇴임 후를 지켜줄 리가 없다.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도 전임자를 백담사로 보냈는데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이 배신의 시대에 배은망덕을 개혁으로 착각하는 좌익의 세계에서 그를 지켜줄 후계자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를 지켜줄 사람은 국민들 뿐인 것이다.
노대통령은 한미 FTA 협상에서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다른 것은 신경을 쓸 것이 없다. 얼마 남지 않은 임기 동안에 한미 FTA만 잘 다듬어 무사히 국회 비준을 끝냄으로써 “노대통령, 정말 잘 했어요” 하는 말을 그가 두고 두고 듣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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