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
사무실에서 동료와 얘기를 하던 중 한인 대학원생의 이메일을 받았다. 급한 일인가 싶어 열어보고 나서 한마디 했다.
“아, 한국 학생들이 ‘케빈’이라고 부를 땐 정말 싫단 말야!”
이메일에서 그 학생은 나를 ‘케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동료는 웬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농담인 것은 잘 알지만 너무 뜻밖의 말이었나 보다. 그는 내가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자신감 없는 사람들이나 이름 뒤에 ‘박사’ ‘교수’ 같은 직함을 남용한다고 생각하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 메일 끝에 이름을 쓰면서 ‘박사’를 붙이는 동료들을 놀리며 함께 웃기도 했으니 말이다.
내가 강의를 하며 가장 즐겼던 것은 얼럼(Earlham) 대학의 초청교수로 일할 때였다. 인디애나에 있는 이 대학은 1874년 퀘이커 교도들이 세운 학교이다. 퀘이커 전통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에 깊이 뿌리를 내렸는데 그 바탕이 되는 겸손함 때문에 직함 따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모두 나를 ‘케빈’이라 불렀고 총장까지도 성을 떼고 홑 이름으로 불렀다. 그곳에선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신선하기 조차했다.
우리 대학엔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교육을 받는 미국인 학생들이 제법 있다. 졸업장 취득이 직함을 얻거나 엘리트 대열에 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배움을 통해 세상에 더 깊게 관여하는 길 중의 하나임을 배워야 할 학생들이다. 이들에게도 편한 호칭으로 나를 부르게 하지만 대개 처음엔 ‘커비 교수’ 혹은 ‘커비 박사’라고 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물론 유교 전통은 퀘이커 전통과 달라(비록 한국에 함석헌 옹과 퀘이커 전통이 존재하지만) 한국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한국에 갔을 때 사람들은 으레 나를 ‘교수님’이라고 부르고 말할 때면 항상 ‘하시다’의 ‘시’, ‘하세요’의 ‘요’를 썼다. 처음엔 몹시 불편했으나 점차 적응이 되었다.
그러더니 재미있게도 미국에 돌아온 후에는 한인 학생들과 영어를 하면서 그 말투가 영어에도 적용되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많은 한인 학생들이 조심스럽게 ‘교수’ ‘박사’라고 부르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많다. 미국 사람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스스럼이 없다고 여겨서인지 처음부터 대뜸 이름을 부른다. 앞의 이메일에서처럼 홑 이름으로 부르는 학생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이젠 내 쪽에서 적응이 쉽지 않다.
이런 혼란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양 언어는 한국어나 일본어 보다 덜 모호하고 덜 복잡하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맥만 따져보면 어느 언어가 더 복잡하다, 아니다의 토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영어로 ‘He read it’ 이라 말할 땐 듣는 이나 주어에게 존대를 표하지 않아도 된다(한국어로 하면 ‘읽으셨습니다’ ‘읽었습니다’ ‘읽으시다’ 등 표현이 여러 가지가 된다). 이것은 영어가 함축어임을 보여준다. ‘미국인들은 예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미국인들의 ‘예의가 모호하다’는 뜻이다.
미국인들 중에도 이런 모호한 규칙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공평하건 안 하건, 그렇지 못한 미국인들은 ‘클래스가 없다’는 지적을 받으며 얕보여진다.
‘클래스가 없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 학교 비즈니스 학위 과정 중엔 그런 ‘예의의 모호함’을 경험하지 못한 시골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특별 과정이 있다. 비즈니스의 성공적 대화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지만 간단하게 배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한인 대학원생이 미국 교수들을 처음 대하면서 친근함을 표시하기 위해 홑 이름을 쓰기로 했다면 큰 오산이다. 나도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오산을 하여 수도 없이 창피를 당했던 일들이 기억난다. 어떤 경우는 알고 지났지만 어떤 경우엔 모르고 지났다. 우리는 모호한 종족이다. 우리 모두는.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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