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 위한 노인 마음이야
노인 위한 후세 마음이야
EB한미노인봉사회 제27주년 기념행사
쌀 몇가마도 번쩍 들었다, 그때는. 들쳐매고 뛰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젓가락질도 버겁다. 어두운 밤길에 장정 서넛과 대판 싸움질도 했다, 그때는. 그러나 이제 멀건 대낮에 혼자 걷기도 힘들다. 비록 총알이 빗발쳤을지언정, 그래서 목숨이 왔다갔다 했을지언정, 6.25 전장터를 누비던 그 젊은 날들이 새록이 그립다. 사나흘 대엿새 굶기를 밥먹 듯했던 그때는 흙지갱이 푸성귀도 달기만 했는데, 이제는 행여 목에 걸치작거릴세라 몽글게 갈아만든 미음도 가끔 혀에 쓰고 목에 칼칼하다. 그때는 밤눈도 대낮처럼 밝았는데 이제는 낮눈도….
세월 앞에 장사가 있는가. 나이듦은 그래서 거룩하다,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위대한 힘이있다. 노인은 그러므로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하다. 지난달 31일(토) 오클랜드 다운타운 한 귀퉁이 이스트베이한미노인봉사회(회장 윤석호) 강당에서 열린 이 단체창립 제27주년 기념행사는 나이듦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잔치였다.
한국에서는 금방 걷혀버릴 줄 모르고 ‘서울의 봄’을 구가했던 1980년 이 즈음, EB한미노인봉사회는 태어났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어떤 인연 따라 북가주에 터잡게 된 젊은 코리안들이 어느새 노인이 되고 그 노인들의 외로움 덜어내기와 정 나누기를 위해 생겨난 이 단체가 벌써 27년이 됐다. 그때의 노인들 중 상당수는 이승을 떠났고, 그때의 노인들을 위해동분서주했던 그때의 젊은이들 중 몇몇은 어느덧 노인회의 핵심회원이 되어 그때의 자신같은 요즘의 젊은이들 도움을 받고 있다.
‘영원한 이팔청춘’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혈기왕성했던 양성덕 전 회장은 구순을 눈 앞에 두고 있다. 회장을 지나 전 회장이 된 그는 이팔청춘을 염원하듯 ‘블루버드’라 이름붙인 이 노인회 합창단이 봄처녀를 부르고 목련화를 부를 때 지팡이를 곧추 세운 채 피아노 옆에 앉아서 웅얼웅얼 따라불렀다. 역시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장동구 무궁화한국학교 교장은 남은 음식을 정성스럽게 갈무리해 그에게 쥐어주었다.
양 전 회장과 함께 EB노인회 기금마련이다 뭐다 팔팔하게 뛰어다녔던 김옥련 본회 부회장은 한뼘 남짓한 단상에 오르기가 뭐할 정도로 다리가 불편해 그냥 앞 맨바닥에 서서 인사말을 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노인회 대소사를 도우면서 “젊은 사람이 마음씨도 곱다”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던 권욱순 북가주 나라사랑어머니회 회장은 벌써 예순. 그 자신 집에서는 할머니 소리를 들으면서도 2년 전 봄에 여읜 어머니 생각에 이날 행사장 한켠에서 훌쩍훌쩍 울었다.
그러나 나이듦이 허무일 수는 없었다. 마음은 언제나 청춘인 우리 어른들이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1부 마지막 순서에서 이현덕 이사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이 이어질 때는 강당이 떠나갈 듯했다. 오는 백발은 흠칫, 패이는 주름은 멈칫. 본보 이민규 국장 사회로 이어진 제2부 기념공연에서는 쉐퍼드대 합창단의 연주, 최수경 무용단의 부채춤 북춤(오고무)이 펼쳐지고, 옹경일 옹댄스 공연단의 창작무용 여명의 빛이 노인회 강당에 새로운 빛을 선사한 데 이어 무궁화한국학교 합창단이 귀염만점 동요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시름을 달랬다. 마지막 무대는 노인회원들 스스로 장식했다. 고운 한복 단정한 정장으로 차려입은 노인회 블루버드 합창단은 자연의 봄을 맞아 인생을 봄을 그리워하듯 ‘봄처녀’를 부른 뒤 ‘장산곶타령’으로 추억의 흥을 돋우고 다시 마음맞춰 소리맞춰 ‘목련화’ 같은 화음을 빚어냈다. 이날 행사에는 이석찬 SF한인회장을 대리해 강승구 사무총장, 이틀 앞선 3월29일 귀임한 정상기 총영사를 대리해 장동령 영사가 나와 축사를 했다.
이동영 SF상의 회장, 김용진 EB상의 회장, 미주체전 조직위 윌리엄 김 위원장과 대니얼 리 홍보이사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부모생각 버무려 웃어른에 대한 공경심으로 인사말을 채웠던 노인회 이사장인 정흠 변호사는 말없이 행사를 지켜봤다. 윤석호 노인회장은 “다들 이렇게 화합하는 게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노인회 사무실 벽에는 화기상재(和氣常在, 화합의 분위기가 늘 함께할지니)라고 쓴 붓글씨가 붙어 있었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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