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태(시인)
내가 미국에 첫 발을 디딘 곳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샌프란시스코였다. 아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그 형님이 거기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날, 샌프란시스코에서 형님을 만났더라면 아마도 나는 그 곳에다 정착이라는 짐을 내리고 지금까지 살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그 형님을 좋아했고 그 형님을 따랐다. 그 형님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의형제를 맺은 형제였지만 나에게 친형이 있어도 그렇게 의지하고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영수! 내가 형을 만나고 나서 슬쩍슬쩍 지나가는 낌새로 알아차렸지만 형의 집안은 가난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당당했던 그 형이 나는 부러웠다. 테너 가수의 목소리보다도 더 우렁차게 쩡쩡거리는 목소리를 서울 장안의 명동에 뿌리며 다니는 그의 뒷주머니에는 항상 영어로 된 책이 한 권 꼽혀 있어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왜냐하면 형은 서울에서 김두한씨가 회유를 할 만큼 알아주는 의리의 주먹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을지로 3가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 체육관 내 공수부(태권도)에서 사범 노릇을 하면서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싸움에서 아무도 그를 이기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맞았다 하면 밥을 먹다가도 뛰어나가던 형이다. 그런데도 학업 성적이 우수한 그 때가 그의 나이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으니 나에게는 그저 부러운 존재였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형의 집안이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엄친이 열차에서 암살을 당한 후부터 갑자기 기울어진 가정 경제를 홀어머니가 짊어지면서 내리막길로 치달은 것이었다. 견디다 못해 만리동 양정고등학교 앞에서 살던 한옥 큰 집을 정리하고 이사를 한 곳은 거칠게 부는 바람에 흙담 마저도 머리를 내젓는 깎아지른 아현동 산 중턱이었다.아이들은 다 어리었다. 아침에 집을 나선 어머니는 밤이 되어도 발품을 거두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들이 즐기는 여유나 돈 대신 어려운 형편을 빈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그는, 얼마 되지도 않는 학교 공납금을 내지 못하여 학교로부터 재촉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선생님들에게 맞서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아무도 그가 가난한 줄 몰랐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경제가 방향을 모르는 어려운 한국에서 가난을 벗어나는 길은 미국으로 유학을 하는 방법이 최선이고 최단 거리라고 믿었고 그 계획의 실천은 그의 개척의 길이었다. 그는 국립도서관 뒤쪽에 자리잡은 E.L.I. 영어학원에 수강료 대신에 뚝심을 내밀고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유학시험에 합격을 하고 미국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비가 없었다. 비로소 그의 우렁찬 큰 목소리도, 그의 당당하고 뱃심 좋은 행동도 머리를 숙일 만큼 그에게는 처음으로 헤쳐나가지 못하는 어려움이었다. 힘없이 머리를 숙여가던 그가 무슨 수로 자신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 후, 나는 그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아무도 그의 뒷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땅 어디엔가 있으리란 생각에 수소문하여 찾으니 내가 처음으로 발을 디디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지금까지 한 곳에서 계속 살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곳은 내 둘째 아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여 손자 손녀와 아들 내외도 볼 겸 일년에 몇 번 가는 곳이기도 하다.넘어진 김에 누웠다 간다고, 나는 그 곳에 갈 때마다 형을 만나면서 아들 식구도 보고, 아들네 식구를 만나면서 형도 만난다.
50년을 지켜온 형제의 결의다. 내 아버지가 못마땅하게 여겼던 문학의 길에서 “너는 절대로 글 쓰기를 포가하지 말라”하면서 좌절을 용기로 등을 떠밀어 주었던 영수 형. 아무도 모르게 미국으로 떠난 후 아현동 산마루 그의 집을 갔을 때 가시 달린 바람이 문도 없는 마루에서 미친듯이 뛰고 있었으며, 그가 신던 헌 구두는 섬돌에서 구멍을 내보이며 움츠리고 있었다. 나는 그 때, 형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이제 드문드문 찾아가는 샌프란시스코, 일본 사람들이 판을 치던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사람들이 편안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던 형을 살아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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