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곤 대왕은 지금으로부터 4,300년 전 처음으로 풍운의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통일한 아카드 제국을 세운 인물이다. 신녀였던 사르곤의 어머니는 아기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르곤을 낳자마자 갈대로 엮은 바구니에 넣어 강에 띄워 보낸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결국 왕이 돼 대업을 이룩한다.
기원전 700년께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군신 마르스와 신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역시 이들의 어머니도 아기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이들을 요람에 넣어 티베르 강에 흘려보낸다. ‘강의 신’ 티베리누스의 보호를 받은 이 쌍둥이 형제는 늑대 젖을 먹고 자라나 나중에 로마 창업의 기틀을 다진다.
사실상 유대민족 국가 탄생의 발판을 마련한 모세도 비슷하다. 아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갈대 바구니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낸 아들이 나중에 유대 민족의 지도자가 돼 박해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고 홍해를 건너 시내 산에서 야훼로부터 10계명을 받기에 이른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괴물 메두사를 죽인 페르세우스는 제우스와 다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딸이 낳은 자식이 자신을 죽일 것이란 신탁을 받은 다나에의 아버지는 딸을 탑에 가두지만 제우스가 햇빛의 형태로 다가와 다나에를 임신시킨다. 이윽고 아기가 태어나자 이를 차마 죽이지 못한 아버지는 이들 모자를 상자에 넣어 바다에 버리나 신들의 보호 속에 구조된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강의 신’ 하백의 딸 유화 부인과 태양신 해모수를 부모로 태어났다. 남편의 버림을 받은 유화를 부여 왕 금와가 궁궐로 데려온다. 해모수가 햇빛이 되어 유화 방에 들자 유화는 임신한 후 아기 대신 커다란 알을 낳는다. 금와가 불길하다고 길가에 내다버리나 소와 말은 피해가고 새들이 품어 돌봐 준다. 여기서 태어난 것이 주몽이다.
나중에 금와의 아들 대소가 죽이려 해 도망가던 주몽은 엄수 강가에 이르러 발이 묶인다. 이에 “나는 태양신의 아들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다. 도와 달라”고 외치자 자라와 물고기가 다리를 만들어줘 화를 면했다는 것으로 돼 있다.
한국 고대 국가 ‘건국의 아버지’ 중 알에서 태어난 것은 주몽만이 아니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도 알에서 나왔고 신라 4대왕인 석탈해도 그의 어머니가 알을 낳아 상서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궤에 넣어 바다로 떠 내보내 신라에 도착했다.
이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시간적으로 수천 년, 공간적으로 수만리나 떨어져 있음에도 기본적인 패턴은 놀랄 만큼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버려진 아들, 강과 바다, 극적인 구조, 고난의 극복, 대업의 완성이라는 줄거리 말이다.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많은 신화학자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영웅 스토리의 원형은 하나이며 세계 각국의 영웅 신화는 이것이 지방색에 맞게 각색된 변주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영웅의 원 신화’(monomyth)라 부른다.
이 학설의 대표적 주창자는 ‘천면 영웅’(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을 쓴 조셉 캠벨이다. 그에 따르면 영웅 모티프는 모든 인간이 부모 품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된 성인으로 자라기 위해 겪어야 하는 내적 과정의 상징화로 모든 인간의 두뇌에 각인돼 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작 ‘신의 가면’(The Masks of God)에서 세계의 모든 신화는 한 신화의 변형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 제일 잘 알려진 사람은 조지 루카스다. 그의 대표작 ‘별들의 전쟁’(Star Wars)을 보면 우주를 무대로 한 작품도 영웅 이야기의 기본 패턴만은 수천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시청률 50%를 넘나든 국민 드라마 ‘주몽’이 끝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뭘 보고 사나’ 하는 허탈감에 빠져 있다 한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모든 영웅 스토리는 인간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갈망의 소산이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색다른 형태로, 그러나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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