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다. 이날 공격으로 미군 2,400여명이 죽고 1,100여명이 다쳤으며 전함 5척, 구축함 3척, 순양함 3척, 그리고 188대의 전투기가 부서졌다. 일본군 피해는 전사 64명, 포로 1명, 비행기 29대, 잠수함 4척이 파괴된 게 전부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본군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많은 사학자들은 진주만을 기습한 그날 일본 제국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 났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당시 일본과 미국의 생산력은 이미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차는 더 벌어져 도저히 일본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오는 것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진주만 기습 공격을 지휘 감독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도 이같은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미국 유학을 통해 미국의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으며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여섯 달은 잘 뛰어 보겠지만 그 다음은 모르겠다”고 말해왔다. 진주만 6개월 후인 1942년 6월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제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정면으로 붙어 이길 수 있는 나라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미국에게도 한 가지 약점이 있다. 웬만한 일로는 좀처럼 전쟁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인의 생명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추구해야 할 이익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독일과 일본의 침략정책을 보고도 힘을 쓰지 못한 것은 이런 국민들의 불개입 여론 때문이었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미국에 와 5일 미국과 협상중이다. 지난 번 타결된 북 핵 관련 6자 회담 마무리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적으로 피폐한 나라의 대표치고는 금발 미녀들이 춤을 추는 뮤지컬을 관람하는 등 느긋한 표정이라고 한다.
이번 협상과 관련,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종래 부시에 비판적이었던 리버럴 언론은 조용하고 그를 지지해 오던 월스트릿 저널, 내셔널 리뷰, 워싱턴 타임스 같은 보수 언론은 비판의 강도를 높여 가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다 지난 주 조셉 디트레이니 국가정보국장은 의회 청문회에서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존재에 대한 신뢰도를 하향 조정했다. 이 프로그램은 2002년 제임스 켈리가 북한을 방문, 존재 여부를 따지자 북한 측이 시인해 북 핵 위기를 촉발시킨 핵심 사안이다. 미 고위 당국자가 협상을 앞두고 자진해 북한 측 손을 들어준 셈이다.
앞으로 북 핵 문제 해결의 최대 걸림돌은 폐기 검증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위장 폐기를 막기 위해 까다로운 검증을 요구할 것이고 북한은 최소한의 형식적인 검증을 원할 것이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불쑥 나온 디트레이니의 발언이 예사롭지 않다. 부시 행정부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넘어가려는 조짐일 가능성이 높다. 강경파인 존 볼튼 전 유엔 대사와 보수 언론들이 이를 물고 늘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번 6자 회담 타결은 미국이 북한 측 요구를 대폭 수용함으로써 이뤄졌다. 베를린 2자 회담도 그렇고 핵 폐기 전 방코 델타 아시아의 북한 자금을 풀어주기로 한 것도 그렇다. 이렇게 된 것은 부시가 갑자기 북한을 믿음직한 상대로 여겨서가 아니다. 자신이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사태는 풀릴 전망이 보이지 않고 이란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태에서 북한을 상대로 무력 사용을 각오해야 하는 강경책을 쓴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무리라는 판단이 섰다고 봐야 한다.
사람들은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까지 유화정책을 펴 2차 대전의 참화를 부른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수상과 케냐 미 대사관 폭파 사건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코바 타워 폭파 사건을 보고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다 9/11 사태를 부른 클린턴을 비난한다. 그러나 지금 부시를 보면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가 직접 공격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무력 사용을 불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자국민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이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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