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북 대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회담 합의문이 나온 다음날 남북 장관급회담을 복원키로 하는 등 성급한 접근을 하고 있는 남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향해 줄달음질을 치고 있는 느낌을 준다. 금년의 대통령선거에 사활이 걸린 노무현 정부와 북한에게 이 정상회담이 판세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절호의 계기이니 그런 이유 하나만으로도 정상회담이 열리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김정일의 서울 답방이 어려운 상황이므로 군사분계선의 중립지대나 제주도 또는 외국의 어느 곳에서 회담이 열릴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남북간, 북미간 평화무드가 최고조에 이를 경우 서울 답방이 불가능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 김정일이 서울을 비롯한 남한을 휘젓고 다니게 되면 한국은 김정일의 판이 될 우려가 크다. 남북간의 평화를 위해서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반대할 명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상회담으로 인해 한국이 북한의 그늘에 가려진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런 정상회담이 흔쾌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다.
더구나 이 정상회담으로 인해 한국의 대선 판도가 요동을 치게 될 것이고 노대통령이 임기가 몇 달 남지 않은데다 지지도가 바닥인데 국민들이 그의 언행에 대해서도 신뢰를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니 과연 이런 정상회담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회담의 당사자인 노무현과 김정일은 닮은 데가 많은 사람들이다. 육성 녹음으로 들어본 김정일의 말솜씨는 시원시원하고 활발하여 막힘이 없다. 그는 실제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침없는 말 속에 확신이 차있다. 거침없이 말을 하는 것은 노무현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쏟아낸다. 그는 김정일이 가진 강력한 권력의 뒷받침 대신에 자신의 오기로 거침없는 말을 한다.
그러나 확실히 다른 점은 김정일의 거침없는 말 속에는 그의 일관된 비전과 철학, 북한을 위한 면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김정일은 몇 달 후에 자리를 물러나는 한시적 권력자가 아니라 대를 이어 그들의 혁명을 성취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노무현은 몇 달이면 그만 둘 사람이니 몇 달 장사할 사람과 평생 장사할 사람은 마음가짐부터 다를 것이다.
그리고 집안에서 새는 쪽박이 밖에서라고 새지 않을 수 없다는 말처럼 국내에서도 엉뚱한 제안을 했다가 여론의 외면을 받으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그가 일본 수상에게 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하자고 한 것처럼 또 어떤 말을 하여 사람들의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할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나이로 보나 권력기반으로 보나 노무현은 김정일의 상대로는 개인적으로 그리 우월한 입장이 아닌 것 같다. 정동영이 김정일을 만나고 와서 그를 ‘통 큰 사람’이라고 하여 비난을 받은 적이 있는데 김정일은 통이 클 수밖에 없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는데 어찌 그 통이 크지 않겠는가. 그런데 노무현이 이런 김정일 앞에서 한층 더 통 큰 사람이 되려고 하다가 엉뚱한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지.
과거의 한국 대통령들이라면 김정일에 비해 나이도 많고 언행이 신중하고 세련된 점이 없지 않았으니 김정일과 만난다고 해도 그의 화끈한 성격에 차분히 대응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화끈하기로 말하면 김정일 뺨을 치고도 남을 노무현이 김정일과 어우러지면 불에 기름을 붓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지난번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내일이라도 통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나올 때 노무현이 한 술 더 뜰까봐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정상회담을 권투시합으로 볼 때 홍 코너의 김정일에 비해서 청 코너의 노무현에게 안쓰러운 마음까지 드는 시합이다. 그래도 남북정상회담을 하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에게 보다는 그들에게 좋은 회담이 될 공산이 크다. 남북정상회담은 필요한 회담이지만 이 시점에서 노무현과 김정일이 만나는 회담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앞으로 정상회담이 또 한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될 것 같다.
이기영 뉴욕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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