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선수들이 가장 탐내는 타이틀은 물론 최우수선수에게 주어지는 ‘MVP’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영예로 생각하는 것은 ‘신인상’이다. 왜냐하면 ‘신인상’은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루키 시즌 단 한번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MVP는 최고기량을 발휘한다면 나중에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상이지만 신인상은 첫해가 지나가면 수상기회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최초’라는 타이틀도 단 한 사람 혹은 단 한 조직에만 주어지는 명예라는 점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뛰어 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 최고라 하더라도 그것이 기록이라면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이고 성과라 한다면 그것을 넘어서는 더 좋은 성과 또한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최초’라는 자리는 양보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불멸성’을 지니고 있다.
기록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른 사람은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셸파인 텐징 노르게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메이저리그에 처음으로 진출한 한국선수가 박찬호인 것은 어린아이들도 다 안다. 그러나 두 번째로 태평양을 건너 와 메이저리그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에 가서는 선뜻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부분 김병현 아닐까 하겠지만 답은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잠깐 뛰었던 조진호이다.
‘진화론’의 찰스 다윈은 아슬아슬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19세기 중반 진화론을 연구하고 있던 사람은 다윈뿐이 아니었다. 윌리스라는 학자 역시 다윈과 같은 이론을 정리하고 있었다. 우연히 윌리스로부터 자신의 이론을 평가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던 다윈은 당황해 일단 윌리스와 함께 학회에 공동으로 이론을 발표한 후 그 다음해 자기 이론을 ‘종의 기원’이라는 책으로 출간해 선수를 쳤다. 인류는 지금 다윈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이번 주말 수퍼보울에서 또 하나의 ‘최초’가 탄생한다. 수퍼보울에서 맞붙는 시카고 베어스의 로비 스미스 감독과 인디애나 콜츠의 토니 던지 감독은 흑인이다. 따라서 이기는 사람은 ‘수퍼보울을 거머쥔 최초의 흑인감독’이라는 영예를 안게 된다.
‘최초’라는 타이틀이 안겨 주는 보상과 결실은 크다. 역사 혹은 기록에 불멸의 이름을 남기는 명예가 따라온다. 또 경제적인 시각에서 볼 때도 시장에 처음으로 진입한 ‘최초’는 ‘최고’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아주 유리하다. 마케팅에서 말하는 소위 ‘선도자의 법칙’이 그것이다. 박찬호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는 기본적으로 실력도 있었지만 최초에게 쏟아진 각광과 관심을 자신의 시장성을 높이는데 최대한 활용한 선수였다.
그러나 ‘최초’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자리한다. 중·장년 한인이라면 지난 1976년 여름 어느 일요일 몬트리올에서 날아들었던 양정모의 광복 후 첫 올림픽 금메달 소식의 감격을 기억할 것이다. 모든 이들이 그토록 염원했지만 7차례의 올림픽에서 번번이 인연이 어긋났던 터라 낭보의 감격은 더욱 컸다. 그 다음 참가대회였던 84년 LA올림픽에서는 어떠했는가. 한국선수들은 무려 6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제는 한 대회 10개 내외의 금메달은 보통이다. 한번 금메달을 따니까 봇물 터지듯 메달이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상을 단순히 경기력의 향상으로만 봐야 할까. 그보다는 첫 메달의 자신감이 막연하게 선수들을 가로막던 심리적인 장벽을 허물어뜨린 결과라 보는 게 정확할 듯 싶다. 이렇듯 ‘최초’는 힘 센 코끼리를 묶어 놓고 있던 마음속의 작은 말뚝을 뽑아낸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의 도약에 필요한 시간과 거리를 크게 줄여 주는 ‘축지효과’를 가져다준다. 문명은 ‘최초’를 동력으로 발전해 왔으며 민권은 이를 디딤돌로 개선돼 왔다.
한인 1세들의 정계 도전이 활발해 지고 일부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1세로서 첫 연방하원의원이 됐던 김창준씨에 힘입은 바 크다. 다음 대선에서 힐러리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지, 혹은 오바마가 첫 흑인 대통령이 될 지에 관심이 쏟아지는 이유도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사회적 의미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최초’와 관련해 한인사회는 서서히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는 듯하다. ‘최초의 UC총장 탄생’ ‘최초의 여성행장 탄생’등 의미 있는 뉴스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그 반증이다. 결국 한인사회의 발전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최초가 탄생하느냐에 따라 그 폭과 속도가 결정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도 밟지 못했던 땅에 누군가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길은 생기기 시작한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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