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 다시 본 세계화
“LA 흑인-히스패닉 간 인종폭력 위험 수위”
“반 FTA집회 강행 도심 마비 우려”
“한의사들의 시장개방 반대 집회”
“한국 해외투자 특정국 쏠려 위험”
최근 일간지에 오른 단편적인 기사들의 제목들이다. 매일매일 흘러 넘치는 정보의 집중포화와 걷잡을 수 없는 시대적인 혼란함에 무차별 폭격 당한 우리의 감수성은 더 없이 무뎌진다.
이젠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면 우린 그저 무감각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반짝거리다 꺼져버리는 하나의 물거품처럼 상호관련이 없는 듯한 이 기사들의 이면과 심층에는 우리가 미처 깨달지 못하는 구조가 하나의 체계로 작동한다. 이는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을 알게 모르게 지배하는 거대한 구조이다.
90년대부터 우리사회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한 세계화(Globalization)는 진정한 의미도 파악하기 전에 세계시장개척, 해외여행자유화 등의 다소 들뜬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국가간의 존재와 그 차이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와는 달리 세계화의 거센 물결은 지구촌을 하나의 거대한 단일 시장으로 통합시키며 세상은 무한경쟁체계로 돌입하게 된다.
세계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우리는 후기자본주의, 불평등, 힘의 이동, 문화, 젠더(gender), 다이애스퍼러(diaspora), 인종, 정체성, 포스트모던 문화현상 등의 굴절된 이슈들과 직면하게 된다.
첫째, 경제적 관점에서의 세계화 논쟁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자유주의 경제체계로부터 시작된다. 구 소련의 해체이후 시장과 자본은 “시장은 좋은 것이고, 국가의 개입은 나쁘다”(The market is good and state intervention is bad.)라는 기치 하에 국가의 관섭으로부터 고삐가 풀린다. 경제의 논리가 정치의 논리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자본은 값싼 노동력과 기술을 찾아 세계각국을 옮겨 다니게 되었다. 다국적 기업들은 본사와 공장이 분리되어 국가간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미국은 이제 Made in USA 대신 Made in China 제품으로 넘쳐나고 있다. 범 지구적인 경제의 통합을 위한 자유무역협상(FTA, Free Trade Agreement)은 현재 한국에서도 지속적으로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세계화 물결 타고 세상은 무한경쟁체계 돌입
항상 진실은 단순하며 위선과 거짓은 장황하다. 만약 세계화라는 흐름이 사람들의 삶의 질을 낮추고 다수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다면 이에 대한 방법론적인 재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둘째, 세계를 서구와 비서구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문명충돌의 이슈로 연결된다. 세계화는 서구의 경제, 문화제국주의 형식을 유지하며 문명간의 충돌을 야기시킨다는 주장이다. 많은 반향과 논란을 일으켰던 헌팅턴은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문명의 단층선(fault line)을 따라 “문명간의 충돌은 세계평화에 가장 큰 위협이 되며, 문명에 바탕을 둔 국제질서만이 세계대전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어수단”이라고 역설한다(“clashes of civilizations are the greatest threat to world peace, and an international order based on civilizations is the surest safeguard against world war”).
왜 서로 다른 문명간의 만남이 친밀한 조우가 아닌 충돌이 되야 하는지 그리고 국제질서의 기준이 되는 문명은 어느 문명을 지칭하는지 의문시 되지만 그의 예측대로 현재 국제간의 분쟁과 충돌, 인종간의 갈등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때론 네온 불빛처럼 창백하고 낯선 세계화의 이질적 논리는 역설적으로 사람들에게 문화적 동질화를 그 기반으로 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전세계에 촉발시키고 있다.
셋째, 문화적 측면에서 인류는 테크놀러지의 발전으로 시공간이 축소되며 새로운 강도와 문화적 교류로 특징지어지는 상호작용을 경험하게 된다. 인류는 역사상 오늘날 같은 집단적인 이주와 상호접촉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이는 문화의 잡종화(hybridization)로 이어지며 세계화가 일방적인 통행이 아닌 새로운 종류의 상호작용 체계임을 말해준다. 들뢰즈(Deleuze) 경우는 세계를 리좀적이고 분열적(rhizomic and schizophrenic)이라고 규정한다.
결국, 현대사회의 특징은 탈중심화(decentralization)와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에 따른 뿌리의 부재와 소외, 개인과 이종(異種) 집단들간의 심리적 거리감과 이에 수반되는 의사소통의 부재와 불능, 이미지가 실체를 넘어서는 하이퍼리얼리티 (hyperreality)의 사회 등의 포스트모던 성향을 띄어가고 있다. ‘나’라는 확고한 주체와 공동체를 상실한 포스트모던의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대리 욕망을 충족시킨다.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역사의 주체인가 아니면 이미 구성되어 있는 거대한 구조에 필연적으로 편입되어야 하는 수동적 요소에 불가한가?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단지 인류가 좀더 합리적, 이성적으로 진보하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래서 이 거대하며 차가운 비인간적인 구조가 좀 더 인간적이고 이타적이며 관용과 사랑을 바탕으로 인간의 정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공간이 되길 바랄 뿐이다. 항상 진실은 단순하며 위선과 거짓은 장황하다. 만약 세계화라는 흐름이 사람들의 삶의 질을 낮추고 다수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다면 이에 대한 방법론적인 재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반문해 본다.
<이종덕 객원기자> jdlcom@yahoo.co.kr
♠이종덕 객원기자는 영문학 커뮤니케이션학 동아시아학 매스미디어/문화이론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자신의 서양편중적인 지적 불균형과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실리콘밸리 지역에 거주하며 동아시아(한, 중, 일) 문학, 철학, 문화 등에 대한 심층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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