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전문가들에 따르면 산에서 조난 당한 사람들은 종종 마을 인근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생사를 넘나들며 산속을 헤매다 구조의 손길이 놓여 있는 곳을 바로 눈앞에 두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얼마 전 미국인들을 울렸던 제임스 김도 셸터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지점에서 동사체로 발견돼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수일간 초인적인 의지로 버티며 생명의 밧줄을 움켜쥐고 있던 조난자들이 벼랑 꼭대기에 거의 다다른 시점에 손을 놓아버린다. 바로 앞에 구조의 손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절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산악인들은 “조난사고를 당했을 때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30분만 더 버티라”고 가르친다.
탐 고든은 올해로 18시즌째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흑인투수이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그가 거둔 커리어 성적은 130승 119패 150세이브. 통산 방어율은 3.91로 썩 괜찮은 편이다.
야구선수 고든은 ‘호러소설의 제왕’ 스티븐 킹의 작품에 등장한다. 지난 1999년 출간된 ‘The Girl Who Loved Tom Gordon’이 그것이다. 이 소설은 지난달 ‘탐 고든을 사랑한 소녀’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도 번역돼 나왔다. 킹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열렬팬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소설 집필 당시 고든은 레드삭스의 마무리 투수였다.
이 소설은 트리샤 맥팔랜드라는 9세 소녀가 산속에서 조난돼 일주일 이상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사투하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힘겨운 싸움을 벌일 때 맥팔랜드를 지탱시켜 준 것은 배낭 속에 들어 있던 작은 소니 워크맨이었다. 세이브를 올리면 손을 하늘로 치켜드는 독특한 동작에 반해 고든의 왕팬이 됐던 소녀는 라디오 중계를 통해 레드삭스의 마무리 고든의 활약에 귀를 기울이며 희망을 놓지 않는다.
소녀는 고든이 산속에서 자신의 유일한 친구로서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 믿으며 환상 속에서 고든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최고의 구원투수 고든은 결국 어린 소녀의 구원자 역할을 한다.
어린 소녀와 야구선수를 중심축으로 내세운 소설이라 ‘조난문학’치고는 다소 낭만적인 플롯일 것이라 지레 짐작하겠지만 소설이 주는 긴박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스티븐 킹은 어린 소녀에게 고든이 희망이었듯 “같은 상황에 빠진다면 당신의 구원투수는 누가 될 것인가”를 소설을 통해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견디도록 지탱시켜 주는 힘은 언젠가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으리란 희망뿐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일 수도 있고 어린 소녀의 손을 잡아줬던 야구선수 고든일 수도, 아니면 마지막 잎새일 수도 있다. 희망의 불을 끄면 모든 것이 급속히 사위어져 버린다. 산속에서의 조난도 그렇고 육체의 병 또한 그렇다. 희망을 놓는 순간 삶은 맥없이 꺾여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은 삶을 곧추 세워주는 척추이다.
나치수용소 생활을 통해 인간의지의 위대함을 보여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목격한 절망의 모습을 전해준다. 1944년 크리스마스부터 1945년 새해까지의 일주일 동안 나치수용소의 사망률이 전례없이 급속히 증가했다. 닥터 프랭클은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막연히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집에 돌아갈 수 있겠지 하는 갸날픈 희망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기대가 무너지자 생명도 무너져 버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는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어떤 상황에서도 이를 견뎌낼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삶속에서 종종 조난을 당한다. 악천후를 만나 길을 잃기도 하고 예상치 않은 눈사태로 옴짝달싹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누가 아는가.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당신을 일으켜 세울 따스한 손길이 불쑥 눈앞에 나타날지. 이번 크리스마스가 구원이 계절이 되지 못한다면 ‘희망의 30분’을 떠올리며 또 다시 크리스마스를 기다려야 한다.
오리건주 후드산에 올랐다 조난된 한국계 제리 쿡씨 등 2명의 등반가의 생사가 아직 불투명하다. 생존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다. 그들 또한 ‘희망의 30분’을 떠올리며 생명의 밧줄을 꽉 움켜 쥐고 있기를…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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