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한국엘 다녀왔다. 한국의 가을을 몸으로, 가슴으로 느끼고, 숨 쉬고 싶었다.
내 기억 속에 묻혀 있는 한국의 가을은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기 이전의 산천이다.
단풍으로 물든 한국의 낮은 산들, 바라만 보아도 포만감을 주는, 들판에 가득한 고개 숙인 벼, 하루가 다르게 익어가고 있는 감, 밤, 어머니의 집 뒤 안뜰에서 여물고 있는 대추알들, 따스한 햇살 속으로 파고 흐르는 멜랑콜리. 가을의 대기 속에 묻어 있는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고 참으로 드높고 푸른 한국의 가을하늘, 이런 것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나는 10월이 오면 한국으로 향한 향수로 안달을 한다.
그래서 서둘러 짐을 챙기고 급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오른다. 그리고는 우리들의 기억이란 얼마나 주관적이고 편집 선별되어져 있는지 절감하곤 한다. 아니, 어쩌면 내 기억은 정확한데, 내가 기억하는 것들이 형체도 못 알아보게 변해 버렸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이 아예 존재 이전으로 뒷걸음을 버리지 않았나, 하고 혼란스러워지기도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런 가을은, 이제, 없다. 하늘도 그렇게 높지 않고, 청명하지도 않다. 빌딩 숲 사이로 가까이 내려앉은 조각난 하늘. 시골 들판에서 쳐다본 하늘도 옛날 같지는 않았다. 지난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올해는 감도, 밤도 시원치 않다고 어머니는 당신 탓이라도 되는 듯 괜히 미안해 하셨다.
은행잎이 쌓여 있는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도, 사람들 틈에 밀려, 가슴에 와 닿는 우수를 새겨볼 겨를이 없었다. 너무 붐비고, 너무 화려하고, 너무 부유하고, 너무 태평스러워 보였다. 북쪽의 핵 실험 때문에 여행 일정을 바꾸었던 내 자신이 조금은 어리석게 느껴질 판이다. 이방의 어느 도시를 방문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순간적이지만 나를 놀라게 한 적도 있다.
내가 미국 땅에서 느끼던 그런 편안함, 내 집이니까, 내가 선택한 나라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 인터넷과 전화 한두 통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열려 있는 사회에 대한 인식이 새삼스럽게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시인인 친구가 어느 가을 방문 때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너의 정서는 60년대에서 정지되어 버린 것 같다. 네가 기억하는 그런 한국은 이 땅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수긍하면, 너의 방문이 더 신날 텐데. 나는 친구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구가 출판한 여러 시집을 읽었지만 내게 감동을 주는 것은 초기 작품 몇 편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한국의 옛 시들을 읽는다. 아마 그것은 나의 마음의 고향,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내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는 그 시절의 한국을 못 잊어 하는 사랑의 표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 나는 남해안 여행 중 남망산 수향정이라는 이름도 아름다운 산정에서 김소월의 시도 읊고 ‘님의 침묵’도 암송했다. 옛 친구들과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를 합창하기도 했다.
산천은 결코 의구 하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의 친구들은 변함없이 정다웠다. 순천만 갈대 밭 사이 길을 걸어, 무진 나루터의 안개를 뚫고 솟아오르는 아침 해도 보았다. 이런 것들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옛날에 모르던 것을 새롭게 만나면 언제인가 그것들은 기억 속에서 새로운 자리를 굳힐 것이다. 마치 소렌토의 주황 빛 감처럼.
어느 해,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다. 소렌토의 호텔 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뒤뜰에 커다란 감나무가 서 있었고 빨간 감들이 나무가 휘어지게 매달려 있었다. 너무도 반갑고 놀라워서 나는 호텔 매니저에게 달려갔다. 아무도 따지 않는 저 감을 내가 좀 따도 괜찮을까, 나의 고향 나라에도 저런 감이 가을이면 풍성하다. 덕택에 우리는 함께 여행하던 일본친구, 미국친구들과 이틀 동안 감을 먹으며 즐겼다. 새로운 고장에서 새롭게 얻는 좋은 경험은, 오랫동안 귀한 추억으로 남는다.
이제 한국에 가면 사라진 것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속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야겠다. 내 가슴 깊이 자리한 기억속의 내용물들을 분리수거할 때가 된 것 같다. 특히 나의 고향 나라 한국에 관해서, 떠나고 없는 것에 연연해 하지 말 것. 이번 가을 외출에서 얻은 큰 수확이다.
송정원
베벌리힐스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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