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영(논설위원)
하루하루 살다보니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달, 12월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지나간 1년이 짧았다 생각되는지, 아니면 길다고 느끼는지 가늠해 보면, 한 해 동안의 내 삶이 즐겁고 보람되었는가, 아니면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는가 하는 판가름이 나게 되어 있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른가 하며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돌아오는 한 해도 더욱 짧게 느껴지도록 해야 할 것이고, 지나간 1년이 지루했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낱낱이 찾아봐야 한다. 그 시간이 바로 이 12월이다. 올해는 이제 더 이상 넘길 달력이 없다. ‘12월’ 하면 사람들은 항상 ‘마지막’이라는 말을 붙이는데 12월은 절대 마지막 달이 아니다.
12월은 새해를 뱃속에다 잉태하고 있는 임신부와 같은 달이다. 아이를 출산할 때 미숙아가 된 아이를 낳거나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 혹은 눈 먼 아이, 아니면 말 못하는 아이 등등, 이런 아이가 태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불행 중의 불행이다. 12월이 잉태하고 있는 아이가 그런 장애의 새해라면 지금까지 안고 온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으로 또 한 해를 지내야 한다.
12월이 올 때 마다 사람들은 흥분에 젖어 축하연을 많이 하는데 과연 연말에, 말마따나 마지막 달에 무슨 축하할 일이 그렇게도 많은지...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엄밀히 말해 12월은 흥분에 젖어 춤을 춰야 할 달은 아니다.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은 마지막 잎새가 조용히 떨어지듯 되도록 1년 동안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조용한 마음으로 내가 나를 다듬어야 할 그런 시간이다. 불경기에 돈벌이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고통을 당한 사람들, 생각지도 않은 사고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 예기치도 않은 병에 시달리게 된 사람들, 또 갑작스레 불운에 닥친 사람들,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가? 그 것은 평소 자기 자신과 생활에 무심했고 무방비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국 사람은 좋게 말하자면 단단한 민족이다. 그러나 다르게 얘기하자면 준비성이 없는 무방비의 민족이다. 그 예를 들면 임진왜란 때 나라가 전화를 당한 것도 무방비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그 막강한 고구려가 망한 것도 내분으로 인한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이다. 또 이조 말의 민비 시해사건도 무방비했기 때문에 일어났고 왜놈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생겼다. 항상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걸 찾으려고 이를 악물고 싸울 준비를 한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미리 미리 준비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급하지 않아도 되고 서두를 이유가 없다.
중국인들의 ‘만만디’라고 하는 것은 평소 그들은 준비를 하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든 느릿하고 여유가 있는 것을 말함이다. 평상시 준비하고 대비하는 습성은 한민족이 갖지 못한 이들의 특이한 기질이다. 그래서 그들은 망해도 10년 먹을 것은 가지고 망한다고 한다. 그에 반해 한국 사람은 남한테 갚아야 할 빚만 잔뜩 안고 망한다.
그러니까 지난 1년 동안에 어떠한 불행이나 고통이 나에게 있었다 할 것 같으면 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 원인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평소에 준비하지 않은 무방비였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민족의 특징을 보면 아무 일이 없었을 때는 자만하고 불행한 일이 닥치게 되면 발을 동동 구른다. 이런 인종은 아마 우리 민족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옛날에 우리가 중국인들을 보고 말하기를 ‘떼 놈들 시끄럽다’ 했는데 사실 우리민족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가보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이것은 혹 자만이나 허세, 허풍소리 때문이 아닐까. 연말에 식당에 가 한번 쯤 1년을 어떻게 살았나 상대방과 조용한 말로 얘기를 하다 보면 12월도 되도록 차분히 지내고 싶을 것이다. 준비나 방비는 조용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지 허세를 부리거나 자만과 허풍, 큰 소리 속에서 나오는 게 절대 아니다.
그러니 공연히 흥분하지 말고 12월을 조용하게 엮어나가 보자. 그러면 그 가운데서 최소한 새해는 정상적인 아이로 건강하게 태어날 것이고 최대한 우리에게 큰 결실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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