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태(시인)
예쁘다는 것과 아름다움은 전혀 다르다. 예쁨은 외관(外觀)이요, 아름다움은 내관(內觀)인 것이다. 강해지려는 남자들의 근육운동과 예뻐지려는 여자의 얼굴 화장은 누구라도 할 수 있으나 아름다움은 아무나 만들어내지 못한다. 아름다움은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지극한 현상이다.
대개 60세가 넘은 분들이나, 혹은 80의 여자 노인들이 그린 그림을 보러 갈 기회가 있었다. 나이가 많이 든 황혼길의 이들이 오랫동안 가슴속에 가라앉아 까딱하면 아주 잊을뻔한 인간의 서정 색깔을 꺼내들고 그림을 그려온 듯 하다. 인간의 고향인 서정, 가슴이 저려온다. 젊은 사람들이 화단에서 활동하며 그리는 그림이야 다분히 출세지향적이지만 나이가 잔뜩 들어 그리는 이들의 그림은 예뻐지거나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워지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회색 바탕에 돋보이게 그린 윤남순 여사의 ‘소망’이란 명제의 붉은 꽃 한송이, 80쯤 되신 노인이 가슴속의 소망을 소화해서 그린 그림이다. 회색이야 나이를 상징하는 바탕이겠지만 그 회색의 색깔 위에 핀 붉은 꽃 한송이, 그 정열은, 사랑하는 마음은, 과거만의 소유가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목을 치켜세우고 찬란한 슬픔으로 피어있다.
강혜선 여사의 ‘추억’이란 소재의 작은 나무 한 그루, 화분에서 스러질 듯 점점 옆으로 누워가는 작은 나무였다. 화분은 그 분의 가정이나 인간관계이겠고 옆으로 스러지는 작은 나무는 그 분의 눈에서 지나가는 세월과 그 분의 맑은 겸손으로 보았다. 나이 드는 순서를 누가 막아주랴! 그래도 화분에서 뿌리는 뽑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애처로움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눈 내리는 우리 동네’를 그리신 최정혜 여사, 흰눈이 내리는 플러싱의 밀집된 아파트 붉은 벽돌건물들, 백의민족을 흰 눈으로 대치하여 어울리지 않는 현대의 붉은 벽돌건물 밖 이민 위에 무심히 내리는 정경이 그리운 강가의 서울을 더욱 그립게 한다.황혼기에 그린 그림이라 그런지 붉은색이 많거나 선택된 다른 색깔도 모두 진하다. 나이 들어 돌아다 보는 뒤안길에는 회한이 두꺼우니 잡히는 색깔이 진할 수 밖에 없었겠지...
모든 예술작품은 감춘 내용을 선뜻 보여주지 않는다.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상하는 사람에게만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상의 재미가 거기에 있고 그리고 감상의 대화가 화가와 나의 것일 수밖에 없어 전율이 생긴다.
가는 발길을 멈추게 한 신진희 여사의 그림들, 모두가 상징을 감추면서 은유로서 문도(文徒)인 나를 잡고 흔들고 있었다. 이런 아이에게도 때가 낄까? 비둘기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며 앞으로 가는 어린아이의 ‘꿈의 계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평화란 과연 꿈에 지나지 않을까?
비둘기란 유엔기로부터 시작해서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나, 심지어는 종교에서도 평화의 상징으로 평화라는 말을 대신하고 있다. 그 평화를 잡으려고 때가 끼지 않은 청순한 어린아이가 손을 내어밀고 있다. 어른들이 파괴하는 가정의 평화나 사회의 평화를 어린아이가 잡으려고 앞으로 가
는 저 조용하고 간절한 안스러운 발걸음, 깨우쳐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가 역으로 들리는 듯 하다.가을의 추억’, 꽃방망이를 만들어도 남을 양의 꽃을 들고 꽃밭 속으로 걸어가는 소녀는 특이한 소재의 해석이었다.
가을이라 하면 대개 낙엽진 길이나 단풍이 깔린 풍경인데 소녀가 걸어가는 꽃밭은 늦봄이나 초여름에나 볼 수 있는 꽃길이다. 작가의 시간 감각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잘 나뉘어 소화해 내고 있음을 나는 금방 알아냈다. 소녀는 순결이요, 꽃밭은 청춘이요, 길은 세월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열망, 놓고 가기에는 화려하지 않아도 가슴이 저려오는 온갖 색깔의 옛날들, 그러나 뻗어있는 길이란 가지 않으면 길이 아니어서 등을 보이면서 계속 가야만 한다는 슬프고도 아프게 화려한 순명(順命)을 풀어놓은 그림이다.
‘목련’은 향기가 없는 꽃이다. 왜 목련의 꽃송이를 허전한 큰 눈망울처럼 그려 놓았을까? 그렇다. 인생은 끊임없이 향기를 기다리는 목련꽃과 같다. 내가 내 향기에 도취하기 보다는 향기를 들고 와서 향기로 채워주기를 기다리며 몸과 마음을 온통 비워놓고 있는 목련.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면서 아름다워지기를 열망하는 노인들과 신진희 여사를 슬쩍 슬쩍 훔쳐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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