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들이 피아노 음계연습곡 음을 내며 우리 넓은 뜰에서 또르르 구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가을만 되면 일년 내내 외면했던 낡은 피아노 뚜껑을 열고 하는 교본으로 굳은 손가락을 풀고 트로이메라이를 친다. 내가 치는 피아노소리는 낙엽 구르는 소리처럼 매끄럽지 못하지만 나의 내면에서 태동하는 격정을 어쩔 수 없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다가 치다가 달래며, 놓아야 될 것들과 놓지 말아야 할 것들 때문에 몸부림친다.
이제 꽃잎 다 흩날려 보낸 갈잎도 바람과 벗삼아 가을을 보내는 이별시를 읊고 있다. 나는 눈에 닿는 것마다 존경스럽고 귀에 들리는 것 모두 현악기의 울림 같은 환상과 환청에 시달리며 가을을 앓고 있다.
해질녘 짧고 찐한 황혼이 못 겨워 나무 끝에 매달려 손놓기를 거부하는 단풍을 보면, 1952년 11월 어느 날 밤 연애하던 여인을 보내며 쓴 박목월의 시가 생각난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로 시작한 시를 작곡가 김성태가 받고 그 사랑에 전염되어 밤을 새며 곡을 붙였다는 ‘이별의 노래’ 멜로디가 바람 곁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 하다.
행복의 아름다움은 눈에 비쳤다가 사라지고 아픔의 아름다움은 마음에 새겨지는가! 만남의 행복과 소유한 것들을 누리는 만족감의 한계를 이 가을이 교훈하고 있다. 가을은 풍만하면서도 하얀 여백을 채울 때다. 그 여백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나온 발자취마다 곱게 쌓인 추억이나 머리 흔들며 지워온 가슴 에이는 기억들을 새김질 해서라도 가을 앓이를 하자. 가슴에 새겨진 사랑의 이별처럼 아름다운 것 있으랴. 찬바람이 불면 목에 보드라운 목도리를 감아주시던 아버지의 손길, 교정낙엽을 밟으며 구르몽의 시를 읊던 여고시절, 비비안 리와 로버트 테일러 주연의 영화 애수(Waterloo Bridge)를 보고 잠 못 이루던 그 밤이 엊그제 같고, 내 생일 날 우리 집 담 너머에서 포스터 작곡 미국민요들을 중창으로 부르며 나를 불러내 시집을 전해주던 교회 중창단 멤버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로 시작해서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라는 구전이 들어있는 소월의 시 ‘초혼’을 연애편지라고 보내더니 결국 내 이름만 부르다 만 K. 일선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도 토요일 밤 기차를 타고 대구 와서 주일예배 때 성가대 앉은 내 얼굴만 보고 곧 기차를 타고 귀대했다던 S, 흰머리 성성할 그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들도 옛일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이런 얘기로도 남편의 질투를 유도 할 수 없는 나이지만 추억에 잠기는 순간만이라도 나는 양 볼에 홍조를 띄우는 소녀가 된다.
얼마 전 우리 산장에서 아동문학가협회 회원들이 모여 까마득한 기억을 되살려 우리들이 즐겨 불렀던 동요들을 부르며 동심으로 하룻밤을 지새었다.
또 그 밤에 30여년전, 첫 문인들의 모임(LA에 문인협회들이 생기기 이전)을 생각하며 잠자리에서 뒤척였다. 이미 고인이 되 버린 아련한 추억이다. 이 모두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게 내 가을 여백을 채워 주고 있지만, 어쩌면 만만찮은 일상 속의 고뇌와 일그러지고 작아지고있는 나의 현실도피 인지도 모른다.
무엇이던 간에 오늘만이라도 아름다운 추억들, 좋은일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얼마전에 남편이 서울을 다녀왔다. 갈때마다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먼저 간 친구들 중에는 떠남으로 더욱더 친구들의 가슴가슴을 파고 드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게 갈 것을.. 하는 씁씁한 아쉬움을 남기고 간 이도 있단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작은 잎새 하나도 봄, 여름을 거쳐 단풍들었다가 낙엽으로 떨어지고 그 낙엽이 가랑잎으로 마르기까지 삶을 정리하고 있다.
가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람답게 살수 있도록 사색 할 기회를 주는 복된 계절이다. 가을에는 우리가곡이나 요요마의 첼로 연주가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가곡을 들으며 된장을 풀어서 아욱국을 끓여 먹어도 가을 정취를 한층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은 아픈 추억 마저도 보랏빛 그리움으로 곱게 채색해 주는 계절이다.
이성호
시인·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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