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동쪽 서태평양에는 섬들을 흩뿌려 놓은 듯한 나라가 있다. 95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4개 주를 이룬 미크로네시아 연방공화국이다. 그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야프 주에는 진기한 풍습이 살아있다. 선조 때부터 사용해온 바위덩어리 돈을 지금도 화폐로 통용하는 것이다.
‘돌 화폐의 땅’이라고 불리는 이 섬에 가면 거대한 도넛 모양의 돌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고 한다. 길가에 세워져 있기도 하고, 담에 기대져 있기도 하며, 숲 속에 감춰져 있기도 한데 크기가 보통 트랙터 타이어보다 커서 도둑맞을 염려가 없는 게 장점이다. 누구든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할 수밖에 없는 곳이 이곳이다.
그렇다고 모든 돌이 돈은 아니다. 돈으로 쓰이는 돌은 야프에는 없고 멀리 팔라우 섬에 가야 있는 특수한 돌이다. 수백년 전 야프의 조상들은 거친 바다를 항해해서 그곳의 돌을 깎아 돈으로 만든 후 가져왔는데 그 무거운 돌을 운반하느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들 돌 돈의 시가는 개당 수천달러. 가난한 섬나라 수준으로는 엄청난 거액이다. 그래서 공식화폐는 달러이지만 땅을 사고 파는 등 큰돈 거래에는 주로 돌 돈이 쓰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숨겨진 돈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그의 손자 계좌에 41억원이 뭉치로 입금된 사실이 발각되었다. 어린 아이가 그런 큰돈을 벌었을 리는 없고 십중팔구 전씨의 비자금일 것으로 보고 검찰은 수사중이다. 지난 97년 전씨가 2천여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은 후 전씨는 재산 감추기, 검찰은 재산 찾기의 숨바꼭질을 9년째하고 있다.
돈이 없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있는 돈을 없는 듯이 감추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은 아닐 것 같다. 야프에서처럼 커다란 돌덩어리를 돈으로 쓴다면 감추느라, 찾아내느라 수고할 필요도 없을 텐데, 큰돈일수록 형체는 없고 숫자로만 존재하는 세상이니 숨바꼭질이 끝이 없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은 돈은 뭘 해서 벌든 상관이 없다는 해석이 된다. 돈을 이리 버나 저리 버나, 그것이 불법이나 부도덕한 일이 아닌 한, 그 사람의 품격과는 무관하다고 우리는 배웠다.
하지만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돈을 버는 데서보다는 쓰는 데서 사람의 품격이 드러난다.
심리학자 에이브라함 마슬로 박사는 사람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다. 이들 욕구는 단계에 따라 올라가는데 그 가장 첫번째 욕구는 생리적 욕구이다. 생리적 필요가 만족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불안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안전욕구가 찾아들고, 이어 소속감을 느끼고 사랑 받고 싶은 욕구, 남들 앞에서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은 욕구가 생기며 이 모두가 충족되고 나면 마지막 단계로 자기 실현의 욕구가 생긴다고 했다.
우리가 돈을 쓰는 데도 이런 단계가 있는 것 같다. 번 돈으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의식주라는 생존의 기본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보험도 들고 저축도 함으로써 앞으로 닥칠 위기 상황에 대비를 한다. 욕구의 처음 두 단계에 해당이 된다. 다음 단계는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상관이 있어서 가족, 친구, 혹은 소속된 단체를 위해 돈주머니를 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생면부지의 불우한 사람들의 고통이 내 고통으로 느껴져서 그들을 위해 성금을 내고 알뜰히 모은 재산을 장학금이나 사회복지 사업을 위해 내놓는 단계가 되면 마침내 돈 쓰기의 ‘고수’가 되는 것이다.
인생이 재미있는 것은 돈 벌기의 고수와 돈 쓰기의 고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가 더 많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자기 가족 먹고 입고 노는 데 다 써버린다면 그 인생은 최하위 단계, 사람으로서의 품격은 가장 낮은 수준으로 끝나고 만다.
올 한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추수감사절기이다.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 보다는 얼마나 잘 썼느냐를 추수의 내용으로 삼았으면 한다. 하늘의 곳간을 채우는 추수이다.
올해도 나 한몸 먹고 입고 끝났다면 그 삶의 풍경은 너무 적막하다. 내가 번 돈이 어느 추운 영혼에 힘이 되고, 아픔에 위안이 되고, 캄캄한 절망에 빛이 되었다면 그것은 얼마나 멋진 수확인가. 꽁꽁 숨은 비자금들이 채권이나 예금 같은 숫자의 탈을 벗고 나와서 이런 따뜻한 일들에 쓰인다면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아질까.
돈을 어디다 쓰는 가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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