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사람을 만나고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좋은 관계를 만들기도 하고 그렇지 못 할 때도 있다. 그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내가 더 성장할 수 있었다면, 조금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면 그런 만남은 특별히 귀한 경험일 것이다.
사전에 인연이라는 단어가 있다. 불교학적으로는 카르마라고 부르고 기독교에서는 신의 섭리라고 한다면 그렇게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어쩌다 그 시간 그 자리에서, 하필이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런 해우는 축복일수도, 경우에 따라서는 불행일 수도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랑의 이야기가 우연한 듯 보이는 만남을 전제로 하는가. 또한 얼마나 많은 가슴앓이가 우연한 만남에 원인을 두는가. 축복 받은 인연의 덕으로 나는 소피아 크라우스 부인을 만났다.
오래전 내가 시애틀 워싱턴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였다. 나의 룸메이트 줄리아와 내가 어떻게 그녀를 만났는지 나는 지난달 칼럼에서 얘기한 바 있다. 우리가 캠퍼스의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다 그녀를 만났다고 밝혔다. 우리들의 눈에 비친 그녀는 늙은 노파 학생이었고, 약간은 외로워 보였기에, 소피, 소피 부르면서 우리는 그녀를 친구로 받아 드렸다. 그것은 그때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우리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소박한 우리들의 우정에 감동을 받았는지, 아니면 줄리아와 내가 그녀의 눈에 교육 시켜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 되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그녀는 스스로 우리들의 스승이 되었고, 정신적인 어머니가 되었고, 은인이 되었다. 우리가 알아온 소피는 실제의 소피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집은 워싱턴 호수에 접해 있는 대 저택이었고, 시애틀 인구의 70%를 먹여 살린다는 보잉 회사의 보잉씨의 집이 바로 이웃이었다. 그녀는 시애틀 타임즈가 선정한 ‘시애틀을 움직이는 10명의 인사’중 한사람이기도 했다. 소피는 우리를 대리 딸로 삼았고, 큰 저택의 이층에 침실과 거실이 있는 스위트를 주었다. 우리는 주말과 휴일을 보내는 별장을 갖게 된 셈이었다.
줄리아가 하와이로 떠난 후에 나는 아예 별장으로 들어가 살았다. 소피와 파트타임 흑인 기사가 학교까지 데려다 주곤 했다. 소피의 지시로 나는 매일 신문과 잡지를 읽어야 했고, 적어도 다섯가지의 칵테일을 믹스 할 줄 알아야 된다고 소피는 술 이름들을 가르쳤다. 누구와 어떤 주제에 관해서도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폭 넓은 지식과 상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적인 성장을 멈추는 순간 인간은 늙어 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했다. 심포니 연주회와 오페라 공연에도 데리고 다녔다.
늦은 오후 칵테일 시간에 호수에 뜬 배들을 내려다보면서 소피는 많은 얘기들을 해 주었다. 20세기 초반에 명문 스미스 대학을 다녔던 경험, 미시시피 강위의 유람선위에서 어떻게 남편을 만났었는지,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왜 경영학을 수학하는지, 신과 인간에 대한 그녀의 철학, 그녀가 후원하는 자선사업들에 관해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거실 피아노 위에 놓인 크라우스씨의 흉상 때문에 우리는 작고한 소피의 남편도 잘 아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피아 크라우스에게는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 사업 제안을 해오는 사람들, 정치 자금을 얻으러 오는 정객들 등, 여러 사람들이 소피의 시간을 뺏으려 했다. 그녀는 직감이 빨랐고 시간 관리에 철저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관대했다. 줄리아와 내가 방을 너무 어질러놓아 한번은 가정부가 청소하기 힘들다고 소피에게 불평을 한 적이 있었고, 그날 우리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소피의 제안으로 눈에 뜨이는 모든 것을 가정부가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우리들의 버릇은 좀 체로 개선되지 않았다.
나는 소피와 의논한 결과 버클리로 떠났고, 소피는 내가 남긴 짐들을 챙겨 내려와서 가을 코트를 사 주었다. 나는 버클리에서 남편을 만났고, 라이브러리언이 되었고, 남편과 아이와 함께 친정에 가듯이 소피를 찾아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참 오래 적 이야기지만 내 마음에는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내 역사의 소중한 챕터이다. 나의 중국 친구, 줄리아는 하와이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아직도 방을 어질러 놓고 산다. 곧 한번 만나야겠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소피를 느낄 것이다.
송정원 베벌리힐스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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