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의 개화기에 우리 민족에게 자주와 독립, 개혁사상을 불어 넣어준 선각자를 들라면 단연 서재필 박사를 첫 번째로 꼽지 않을 수 없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 그는 개화사상에 심취하여 일본 육군학교에 유학 후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했고 약관 20세에 김옥균,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주도했다가 3일 천하로 끝나자 멸문지화를 당하고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했다.
미국생활 10년 후 조선에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자주독립과 정치사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독립신문 발행과 함께 독립문을 세운 그는 외세 배격과 자주독립을 주창하여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던 외세, 주로 일본으로부터 방해공작과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주권재민 사상과 정치와 사회의 개혁사상을 유포함으로써 조선정부의 미움을 샀다. 그리하여 2년 반의 활동 끝에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서재필의 활동에 대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1895년 12월 25일 귀국하자마자 그는 대신과 고관, 지식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에 필요한 것’에 관해 강연회를 가졌다. 이것이 우리 역사상 첫 공개 강연회였다. 그는 또 배재학당에 목요강좌를 설치하여 학생들에게 인권과 자유, 평등, 민주주의에 관한 계몽교육을 하고 사상 처음으로 토론식 교육을 했다. 당시 배재학당의 학생이던 이승만은 서재필의 사상에 감명을 받아 어느 비오는 날 초립을 쓰고 서재필 자택을 찾아 가르침을 받기를 청했는데 해방 후 귀국한 그를 박대했던 것을 볼 때 인간사의 아이러니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는 서재필이 이 정도의 위인에 그치지 않는다. 갑신정변 실패 후 1885년 6월 11일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서재필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돈 한 푼 없이 맨손으로 이민생활을 개척했다.
박영효와 서광범은 얼마 후 조선으로 돌아가 관직생활을 했으나 서재필은 고된 노동을 하면서 미국생활을 계속했다. 고학과 독지가 도움으로 고등학교와 대학, 의과대학을 나와 의사가 되었다. 의사도 보통 의사가 아니라 그는 미 육군 군의감 의학연구소의 그 유명한 월터 리드 밑에서 세균학과 병리학을 연구하여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는 등 미국 의학계에 크게 기여한 기라성 같은 의사였다.
그는 미국 시민권을 받고 한인으로는 최초로 백인여성과 국제결혼을 했다. 5피트10인치의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인 그가 미국 상류사회의 유명 가문의 딸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할 때 워싱턴의 사교계에 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1904년부터 20년간 필라델피아에서 큰 규모의 인쇄소와 문구점을 경영했다. 한때 직원이 수십 명이나 되었던 이 사업으로 그는 큰돈을 벌었으나 한일합방 후 독립운동에 모든 돈을 쓰고 회사를 문 닫아 버렸다.
곳곳에 한국 친우회를 만들고 영문 잡지를 발간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일을 돕느라고 한 번에 당시 돈으로 수십만 달러씩 쓰기도 했다. 의사가 되기 전에도 육군 군의도서관 사서로 연방공무원 생활을 한 그는 2차 대전 때는 징병검사관으로 공직생활을 했다. 그 공로로 그는 연방의회에서 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흔히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을 미주한인 이민사의 효시라고 하지만 실은 1895년 미국에 온 서재필이 우리 이민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서재필은 한인 최초의 의사, 최초의 개업의, 최초의 연방공무원, 최초의 시민권자, 최초의 국제 결혼자, 최초의 미국훈장 수여자이며 미국 내의 사업가이며 언론인이며 독립 운동가였다. 우리 민족에게 단군할아버지가 있듯이 재미 한인에게는 서재필 박사가 있다. 고국을 위해 일했고 미국에 기여한 그는 우리 이민 후세에 자랑스러운 사표인 것이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 재단이 그의 기념관에 동상을 세우기 위해 오는 11월 11일 뉴욕-필라델피아 간 마라톤대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 많은 기금이 마련되어 자랑스런 서재필 동상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디 동상뿐이겠는가. 이만큼 성장한 미주의 한인사회에서 한국의 선각자이며 미주한인의 선구자인 서재필 박사를 기념하는 각종 사업이 대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뜻과 정성을 모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기영> 뉴욕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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