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를 보셨는지요. 성하(盛夏)의 계절, 만개한 꽃들 사이에서 윤무를 추고 있는 나비가 아니라 계절이 지나가는 구월과 시월의 경계에서 문득 눈에 띈 저 흰 나비. 너무도 희어 아스라이 분홍빛이 감도는 날개를 팔랑이며 나타나 산길 내내 앞서 날아가던 바로 그 나비를 보셨는지요.
강원도 삼척의 어느 깊은 산 속이라 생각되는군요. 그 때 나는 산길을 걷고 있었지요. 하사관 인솔하에 소대원들을 모두 먼저 돌려보내고 혼자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났을 땐 정수리에 걸려있던 하루해가 조금은 기울어진 오후의 어느 한 때였지요.
비록 귀대 길이었지만 모처럼 혼자서 산길을 걸어가노라니 마음속 깊숙이 가두어두었던 정감이 저절로 흘러나와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갈라진 흙 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기로 촉촉이 젖어있는 바위와 그 위를 뒤덮고 있는 푸른 이끼를 만져보기도 하고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산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며 산길을 따라 걸어올라 갔지요. 산길을 따라 오를 수록 산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산을 휘감고 있는 공기가 속이 다 비치도록 엷디엷은 푸른빛을 띄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던 것입니다.
아직도 당신은 기억할 것입니다. 휴가를 받아 먼길을 달려와 늦가을 날 주룩주룩 쏟아지는 찬비처럼 당신의 문 앞에 밤새도록 서서 낙엽 위에 써놓은 두 글자가 지워질까 조바심 치며 가슴에 품었다가 내어드린 그 낙엽을.
산길을 다 올라 산등성이에 섰을 때 어디에서 왔는지 흰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거리며 내 앞을 어른거리더니 저만치 앞서서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산 속의 만추에 만난 나비가 너무나 놀랍고 반가워 나는 나도 모르게 나비를 따라 무작정 산등성이를 내달렸던 것입니다.
나비가 그 마을로 들어가며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처음 오는 낮선 마을을 기웃거리며 나비를 찾고있을 때 당신은 저 멀리 비포장 도로를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지금 이렇게 말한다면, 석양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는 당신의 등뒤에서 나풀거리는 날개를 보았다고, 나를 당신에게로 데리고 온 바로 그 날개를 보았다고 한다면 당신이 믿어 주실는지, 아마도 당신은 내가 처음 말을 건 그 때처럼 미소를 머금으시겠지요.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구월과 시월의 이 때쯤이면 나는 심한 몸살을 앓으며 가을 속을 방황하곤 합니다. 심하게 병이 도질 때면 나의 나비를 찾아 석양 무렵의 거리를 헤매기도 하지요. 도시, 그것도 LA 한 복판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제 아침, 내가 그렇게 찾고 찾던 바로 그 나비를 보았습니다. 나비를 보는 순간 나는 너무도 흥분해서 내가 내가 아니었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선 나는 곧바로 마켓으로 향했습니다. 마켓 문을 연 뒤 나는 천천히 옆 건물의 커피샵으로 걸어갔습니다. 가을을 지나가는 가로수들은 꽃과 낙엽을 마구 떨구며 포도를 덮고 있었습니다.
커피를 사들고 나온 나는 무슨 충동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에도 쉴새없이 붉은 꽃을 날리고 있는 마켓 바로 앞 가로수 아래로 들어가 섰습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꽃과 잎들 사이로 뚫고 들어와 어른거렸습니다.
그 때 나는 어디선가 온 흰나비가 낮게 낮게 날면서 내 마켓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손에 들고있던 커피 잔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마켓으로 달려들어갔습니다. 나비는 카운터 앞을 돌아서 청과물이 쌓여 있는 곳에서 날개를 접었습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 곳에는 이제는 색이 다 바랜 바싹 마른 붉은 꽃잎 하나가 자몽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꽃잎을 들고 밖으로 나와 허공으로 날렸습니다. 꽃잎이 바람을 타고 흰나비가 되어 날아갔습니다.
나는 눈을 들어 나비가 날아간 길을 멀리 멀리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길이 점점 작아져 마침내 한 점으로 소실되는 지평선 위로 문득 가을의 환(幻)인양 눈부시게 환한 당신이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윤홍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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