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의 룸메이트 줄리아는 그 날 교정의 한 벤치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따스한 가을 햇빛을 즐기며 런치브레이크를 하는 학생들로 주위는 시끄러웠고, 가끔 높은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미드 텀 페이퍼의 마감 날이 임박했지만 참으로 기분 좋은 날이었다.
그런 좋은 날 우리는 소피아 크라우스 부인을 만났다. 훗날 우리가 소피, 소피하고 불렀던 그녀는 우리가 앉은 벤치에 함께 앉아도 좋을지 물어왔다. 그녀도 우리처럼 브라운 백에서 샌드위치를 꺼내어 먹었고, 우리는 이런저런 학교 얘기를 나누었다. 유학 온지 얼마 되지 않는 내 눈에, 그러나, 소피는 대단히 특이해 보였다.
만일 내가 그녀를 캠퍼스에서 지나쳤다면, 나는 아마 연로한 교수쯤으로 보았을 것이었다. 내가 그때까지 알고 있었던 학생의 이미지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자그마한 몸집의 할머니였다. 그녀는 경영학과 미술사를 공부한다고 했다. 이렇게 만난 우리는 자주 점심을 함께 먹었다.
그녀는 동양에 관해서 아는 것이 많았고 우리들의 영어 실수를 무안하지 않게 교정해 주기도 했다. 우리는 그녀가 참 외로운가 보다 짐작하고 친구로 받아들였다. 어느 주말 그녀는 우리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했다. 소피는 검은 유니폼을 입은 흑인 기사와 차를 보내주었고, 호수를 따라 구부러진 길을 돌고, 식물원을 가로질러, 드디어 나무들로 으슥한 드라이브웨이로 내려가 기사는 차를 세웠다. 그렇게 시작된 소피와의 우정은 줄리아와 나의 삶에 잣대로 잴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소피는 우리에게 우선 신문을 읽도록 권했다. 그 밖에 적어도 한 가지의 시사잡지는 읽어야 된다고 했다. 불면제를 먹어가며 밤을 새워도 따라가기 힘든 공부와 1달러도 아껴 써야 하는 우리에게 소피의 주문은 너무 벅찬 것이었다.
소피에 따르면, 공부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끝날 것이나 무식은 학위가 고쳐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와 그 나라와 그리고 우리들이 공유하는 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인간 교육이란 말을 나는 소피로부터 처음 들었다. 소피는 시애틀 타임스의 구독권을 우리에게 선물했고 잡지는 도서관에서 읽으라고 했다. 홍콩 출신으로 대만국대를 나온 줄리아나 한국의 모범생 출신인 나는 소피의 눈에 참으로 무식하고 한심하게 보였던 모양이고 소피는 우리를 교육하기로 작심한 것 같았다.
그녀의 저택에서 열리는 많은 파티에 초대되었고 우리는 소피의 하우스 게스트 혹은 대리 딸로 소개되었다.
그 당시 워싱턴주의 상원의원이던 헨리 잭슨씨도 그런 파티에서 만났다. 풀타임으로 저택에서 상주하는 정원사와 파트타임 기사, 가정부, 요리사들에게도 소피는 우리를 당신의 손님이나 딸처럼 모시도록 일러두었다. 저택은 정원이 끝나면서 모래밭이었고 워싱턴 호수의 물이 백사장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레이크 워싱턴에서 74세의 소피한테서 수영을 배웠다. 후에 우리는 소피가 시애틀 타임스가 뽑은 ‘시애틀을 움직이는 10명의 사람’중 한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소피로 하여 우리는 가난한 유학생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생활을 경험했다. 우리는 박스 시트에 앉아 시애틀 필하모닉을 시즌 내내 즐길 수 있었고, 루빈슈타인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한국, 중국, 그 밖의 친구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었고, 교환 교수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로 소피가 우리에게 남긴 정신적 유산은 이런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소피는 가정부나 요리사가 데리고 오는 흑인 아이들을 너무나 예뻐하였고, 그들의 학비를 부담하고 있었다. 그녀는 성공회 교인이었지만 흑인들의 개신교회나 우리가 나가던 성당에도 함께 다녔다. 믿는 방법과 그 이름이 다를 뿐, 모든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라고 말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인간과의 관계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라고 했다. 첫 관계를 잘 하면 두번째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돈은 이 두 관계의 개선을 위해 쓰여야 가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소피를 생각하면 그리움으로 가슴이 메어진다. 잠들기 전 내 머리 속을 스치는 상념들 가운데 소피와 함께 한 시간들이 너무도 선명하다.
송정원 베벌리힐스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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