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뉴욕한국학교 교사)
추석맞이대잔치, 코리안퍼레이드 등 수만 인파가 참여하는 추석명절 관련 행사로 한인사회가 연일 축제분위기를 맞고 있다. 게다가 한국의 반기문 장관이 유엔사무총장에 확실시 된다는 소식까지 날라드니 주체할 수 없는 신바람에 엉덩이가 절로 들썩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축제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크게 간과하고 지나가는 것이 있어 마음 한구석 씁쓸하다. 다름 아닌 10월 9일 한글날 이다. 세종께서 한글을 반포한지 560주년이 되는 이번 한글날은 특히 한국에서 국경일로 지정된 첫해이건만 어이된 일인지 ‘국경일’ 위상에 걸맞는 경축행사
를 찾기 힘들다.
지난 주말 학생들에게 “한글날이 올해부턴 한국에서 국경일”임을 강조했다. 단순한 기념일에서 명실상부 대한민국 5대 국경일(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중 하나로 격상했음을 알려주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멀뚱하기만 했다. 가장 총명한(?) 아이의 질문이 “공휴일인가요?”였다. “당연하지”라고 답하고 싶은 심정 굴뚝같았지만 “공휴일은 아니다”고 답해야했다. 답변을 듣자 아이들은 “별 볼일 없는 날”임을 확인한 듯한 표정을 보였다.
UN 산하 유네스코(UNESCO)가 1990년부터 매년 문맹퇴치에 공이 많은 개인 단체에 ‘세종대왕상’을 주고 있고 1997년에는 훈민정음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등 세종과 한글의 위대성을 열거해 봤지만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엔 역부족.
일교시가 끝날 때쯤 학부모회에서 준비한 송편이 베이글과 함께 교실로 배달됐다. 매주 이 시간이면 간식으로 베이글이 나왔지만 이날은 추석을 앞두고 학부모회에서 특식으로 송편을 준비했던 것. 기특하게도 아이들은 베이글보다 송편을 더 좋아했고 왜 이날 송편이 나왔는지, 그리고 추석이 미국의 추수감사절에 비유된다는 등 한국의 또래 수준에 걸맞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더욱 기특한 것은 추석날짜가 음력에 근거한다는 것과 보름달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란 것도 아름 아름 알고 있었다. 추측컨데, 다른 한국학교 학생들도 추석에 대해선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갖추고 있으리라.
이에 반해 한글날을 대하는 아이들의 반응은 ‘썰렁’ 그 자체다. 충격적이게도 한 학생은 “세종대왕이 한글 안 만들었으면 한국학교 안나와도 돼겠네요?” 한다. 학생이 반농담으로 한 말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 이 지경까지…”하는 참담함을 맛보았다.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기까지를 되돌아 보면, 오뚜기와도 같은 한민족 근성을 보는 듯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글날은 우리말과 글을 잃게된 일제치하에서 태동했다. 1926년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에 의해 제정 기념되어오던 것이, 광복이후에는 그 중요성을 인식, 1946년 ‘국가기념일’로 정해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그러다가 지난 90년, ‘공휴일이 너무 많다’는 명분하에 공휴일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게된
다. 하지만 이 공휴일 제외 결정은 국민에게 다시 한글날의 중요성을 자각시키는 계기를 마련,
관련단체와 국민들의 10여년에 걸친 오랜 투쟁끝에 오히려 기념일에서 한 단계 격상한 국경일
로 제정된 것이다. 공휴일로까지 지정되지 못한 것은 유감이지만, 한글날이 공휴일이든 아니든
한국에서 국경일이 되었다는 것은 해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에게나 또는 배우는 학생들
에게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한글날이 국경일로 승격됐다고 해서 갑자기 한국인들이 그리고 그 자녀들이 한글에 대해 애착을 가지리라고는 기대치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경일로 된 이상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진지하고 광범위한 방법으로 한글에 대한 애착심을 고취시키며 한글의 세계화에 노력해 나가야 한다. “지구촌을 한글문화권으로 만들자”는 구호나 “글없는 민족에 한글을 수출하자”는 주장 등이 모두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겠지만, 구호만크고 실천이 없으면 공허할 뿐이다. 문자와 언어의 확산은 문화우위가 지켜지지 않는 이상 요원한 것. 모국은 물론 해외동포사회도 풍부하고 격조높은 문화를 유지 발전시켜가는 것이 곧 ‘한글문화권’의 확대요, ‘한글수출의 전초기지’역을 하는 것이리라.
일상의 분주함. 그리고 연휴 놀러갈 계획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이한 560주년 한글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류 유산’ 한글을 만드신 세종께 송구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훈민정음 ‘예의편’ 서문을 되뇌어 본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가 이것을 매우 딱하게 여기어 새로 스물여덟글자를 만들어 내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히어 나날의 소용에 편리하도록 함에 있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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