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연휴에 동부에 있는 딸의 집에 갔었다. 사흘 밤 자는 짧은 여행이어서 짐은 손가방 하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요즘은 화장품을 기내로 반입할 수가 없으니 짐을 부쳐야 했고, 부치자니 가방이 너무 텅 비어서 딸이 좋아할 만한 과일들로 가방을 채웠다.
떠나는 날 아침 공항은 연휴 여행객들로 인산인해였다. 한없이 늘어선 줄 끝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자니 도저히 제 시간에 탑승수속을 마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안되겠다’ 싶어 일단 E 티켓 승객용 컴퓨터로 가서 탑승수속부터 했다.
그리고는 보안검색대 입구로 가보니 굽이굽이 겹겹으로 늘어선 줄은 건물 밖까지 이어졌다. 가까스로 검색대 앞에 도달한 후 트렁크를 열고 액체형 화장품들을 모두 꺼냈다. “부치려던 짐인데 비행기를 놓칠까봐 그대로 가지고 왔다. 문제가 되면 버리겠다”고 검색대 직원에게 말했더니 그는 친절하게 나를 위로하면서도 로션, 에센스, 파운데이션, 크림 등을 모두 압수하는 데는 예외를 두지 않았다.
비싼 화장품, 와인들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울상 짓던 승객들을 뉴스로 보면서도 남의 일이려니 했는데 그것이 고스란히 나의 일이 되고 말았다. 신발 벗고, 재킷 벗고, 시계 풀고… 검색대를 통과해 우스꽝스럽게도 과일만 가득 든 가방을 들고 비행기를 타려니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새삼 변화가 실감났다. 몇 년 전만 해도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던 공공에 대한 억압이 버젓이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일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정확히 5년 전, 9.11 테러는 평범한 시민들의 비행기 타기부터 국가적 정책 기조까지 너무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테러와의 전쟁’’안보’를 들이대면 인권도, 예산 적자도, 시민의 자유도 명함을 내밀 수 없는 기류 속에 어느 덧 우리는 서있다.
테러분자들이 미국의 심장부를 폭파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2,996명이나 희생시킨 9.11 참사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서 감내해야 할 필요악이 분명히 있다. 테러는 막아야 하고, 안보는 중요하다. 하지만 테러를 뿌리 뽑겠다고 벌인 이라크 전쟁에서 9.11 참사에 버금가는 2,700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고, ‘테러와의 전쟁’ 선포 후 5년간 테러는 더 잦아져서 전 세계에서 수만명이 희생되었다면 그간의 ‘전쟁’ 수행방식을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
9.11 테러의 충격이 다소 수그러들던 2002년 초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알카에다 조직 심층 취재를 위해 파키스탄에 파견되었던 월스트릿 저널의 대니얼 펄 기자(당시 38)가 1월말 이슬람 무장 조직에 납치돼 참수된 사건이었다. 그들 테러조직은 유대인인 펄의 참수 장면을 비디오에 담아 공개해서 충격이 대단했다. 참혹한 그 장면을 필경 보았을 그의 부모들의 고통이 어떠했을 지는 상상을 할 수가 없다.
UCLA 컴퓨터공학 교수였던 그의 아버지 주디아 펄(70) 박사는 그때부터 생업을 접고 ‘복수’에 나섰다. 파키스탄 외교관 출신의 이슬람학 교수인 아크바 아메드(63) 박사와 손을 잡고 유대인과 무슬림간 상호이해의 장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저들이 분열을 퍼뜨린다면 우리는 친선을 퍼뜨릴 수밖에 없지요. 그것이 내 방식의 복수입니다”
펄 박사는 ‘대니얼 펄 재단’을 세우고 ‘아들의 이름으로’ 무슬림 파트너와 함께 미국 내외를 돌며 ‘무슬림-유대인 상호이해를 위한 대화의 장’을 열고 있다. 처음 ‘대화’에 반감이 크던 양측 커뮤니티도 차츰 우호적으로 바뀌어서 파키스탄 대통령이 뉴욕 유대인협회에 가서 연설을 하고, 워싱턴의 유대인 대학살 박물관이 사상 처음으로 무슬림인 아메드를 연사로 초청하는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10일로 이라크 전쟁은 발발 1,270일이 된다. 미국이 이제까지 그 전쟁에 쏟아 부은 비용은 3,130여억달러. 문장 몇 개 읽는 1분이면 16만2,000달러, 오늘 하루가 지나면 또 2억3,328만달러가 전비로 추가된다. 그 천문학적 액수의 돈으로 총구 대신 화해와 친선을 뿌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부시 정부의 강경정책은 온건한 무슬림들에게 증오를 심어줌으로써 과격 무장단체들의 세력을 키워준 부작용이 있다. 무력에 근거한 일방주의는 이제 충분히 한계를 드러냈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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