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오픈 4R 진출 실패
나달·로딕·대븐포트·샤라포바 8강 안착
US오픈 테니스대회가 열린 3일. 뉴욕 빌리진 킹 내셔널테니스 센터 내 아서 애쉬 스테디엄을 가득 메운 2만여명 관중은 약 4분간의 기립박수로 떠나는 영웅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경기 후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던 영웅의 눈가에는 이슬이 고였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는 곧 코트로 걸어나와 양손으로 키스를 보내는 ‘트레이드마크’ 세리머니로 이에 보답했다. 한때 여자 테니스계를 지배했던 아내 슈테피 그라프와 아이 둘은 객석에서 조용히 박수를 보내며 아쉬움을 달랬다.
치렁치렁한 헤어스타일 등 야성미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섹시 가이’ 안드레 애거시(미국)는 이렇게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이날 3회전에서 독일의 벤자민 베커(세계랭킹 112위)에게 1-3(5-7 7-6<7-4> 4-6 5-7)으로 패해 21년 여정을 마무리했다.
은퇴무대는 전날 내린 비로 인해 하루 연기됐다. 뉴욕의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었고 청명한 날씨가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애거시의 앞날을 축복하는 듯 했다. 하지만 고질인 허리와 등의 통증이 은퇴 길을 쉽사리 열어주지 않았다.
테니스 역사상 유일하게 올림픽 금메달까지 따내며 ‘골든슬램’을 이룬 남자 선수의 운은 여기까지였다. 그러고 보면 장장 18년 동안 챔피언에 올랐던 선수도 애거시뿐이다.
그러나 베커는 기껏 애거시를 탈락시킨 뒤 4일 9번 시드 앤디 로딕에 0-3(3-6, 4-6, 3-6)으로 완패, 준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한편 여자단식 8강은 탑시드 아밀리 모레스모(프랑스)가 서리나 윌리엄스를 2-1(6-4, 0-6, 6-2)로 꺾고 12번 디나라 사피나(러시아)와의 충돌코스에 올라서는 등 2번 시드 저스틴 에넹(벨기에) 대 10번 린지 대븐포트(미국), 3번 마리아 샤라포바(러시아) 대 27번 타이아나 골로빈, 4번 엘레나 디멘티에바(러시아) 대 19번 옐레나 양코비치의 대결로 압축됐다..
애거시가 은퇴한다. 전에 못 보던 대포 스트로크에 치렁치렁 날리는 긴머리와 튀는 복장으로 재미없는 스포츠 테니스에 화제와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샘프라스, 베커, 에드버그 등 대선수들과 겨루며 숱한 명작을 선사했고, 황혼에서도 최정상 페더러와 붙어도 쉽게 지지 않는 실력과 진지함으로 노장의 멋을 보여줬던 그가 이번 US오픈을 마지막으로 코트를 떠난다.
36세. 다들 가고, 홀로 남아 나이 가는 줄 모르고 라켓을 휘둘렀는데 이젠 그도 종막을 고한다.
안드레 애거시. 그는 들 때보다 날 때 더 큰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가 돼 있다. 이별의 무대에 선 그에게 지금 팬들은 큰 아쉬움과 존경, 사랑을 보내고 있으며 조명은 애거시에 집중되고 있다. 챔피언이 누가 되든 이번 US오픈은 애거시가 마지막으로 뛰었던 대회로 기억될 것이다.
한창 때보다 떠날 때 더 사랑받는 남자. 갈퀴머리 휘날리며 빛나던 젊은 시절보다 대머리 중년의 애거시에게 왜 팬들은 더 크고, 은근한 사랑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불안한 십대에서 대머리 중년이 된 2006년까지 20년 가까이 되는 오랜 세월동안 그의 승리와 고뇌, 인간적 굴곡과 성장을 지켜봤기 때문이리라.
이번 대회가 끝나면 기록과 추억으로 남을 애거시. 대머리가 아름다운 남자 안드레 애거시의 빛나던 순간을 정리했다.
한창 때보다 떠날 때 더 사랑받는 남자
대머리가 아름다운 남자 안드레 애거시
커리어 그랜드슬램 영광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헤어스타일
갈퀴머리에서 대머리. 머리카락은 애거시의 모든 것을 말한다.
훗날 사람들은 애거시를 떠올릴 때 그가 챔피언을 몇 번 먹었느냐 보다 헤어스타일을 먼저 말할 것이다. 나이키 광고에서 “Image is everything”라고 말했지만 “Haircut is myself”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의 튀는 헤어스타일은 무미건조했던 테니스에 활력을 불어넣고 화제를 몰아왔다. 렌들과 샘프라스가 기계적인 완벽함으로 테니스를 재미없는 스포츠로 죽여 버렸다면 매켄로와 애거시는 테니스에 개성과 활력, 열광과 안티를 불어넣었다. 그는 광적인 십대 소녀 등 열성 팬들을 몰고 다녔었다.
헤어스타일은 애거시 내면의 표현이었다. 머리가 바뀌면 그의 테니스와 인생도 요동을 쳤다.
튀는 헤어스타일처럼 초창기 그의 테니스는 불안했다. 대단한 스트로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승부처에서 자신감 결여로 번번이 패했다.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애거시를 지난 1989년 이반 렌들은 대놓고 놀리기도 했다. “그 아이에게 볼 것이라곤 헤어컷과 스트로크 밖에 없어”
다행히 92년 윔블던에서 자신보다 더 심약한 고란 이바니세비치를 만나는 덕분에 그랜드 슬램의 맛을 처음으로 본다. 그러나 96년 해적 두건을 머리에 걸치는가 했더니 그의 테니스는 깊은 심연으로 떨어진다. 최악의 방황기였다. 10년이 지난 뒤인 2006년 테니스 선수로는 할아버지 나이에 여전히 젊은 선수들과 강타를 교환하고 있는 그를 두고 팬들은 아름다운 대머리라고 말한다.
◆엘리트
그는 테니스 사상 손꼽히는 엘리트 대열에 가담한 선수다. 그랜드슬램 대회 8회 우승, ATP 대회 싱글 우승이 60회에 달한다.
그랜드슬램으로는 샘프라스 14회, 로이 에머슨 12회, 로드 레이버 11회, 비욘 보그 11회, 빌 틸덴 10회에 이어 역대 6번째. 프레드 페리와 켄 로즈웰, 지미 코너스, 이반 렌들, 로저 페더러가 8번을 우승해 애거시와 동률.
ATP 대회 다승으로 따져도 역대 6번째다. 최다 승리는 지미 코너스로 105회 우승했으며 뒤를 이어 이반 렌들 94회, 잔 매켄로 76회, 피트 샘프라스 64회, 기예르모 빌라스 62회, 애거시가 60번을 우승했다. 비욘 보그는 57회, 일리 나스타세가 52회, 보리스 베커가 49회, 로드 레이버는 47승을 거뒀다.
◆코트 매스터
그는 잔디, 클레이, 하드 코트 등 모든 종류의 코트를 매스터한 대가였다. 커리어 통산 그랜드슬램 4개 대회를 모두 석권해본 선수는 애거시를 포함해 5명밖에 없다. 매켄로도 못했고, 코너스, 보그, 베커도 못했고, 지금 군주인 페더러도 못했다. 로드 레이버가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이후로는 애거시 밖에 없다. 누가 애거시를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1992년 윔블던, 94년 US오픈, 95년 호주오픈, 99년 프랑스 및 US오픈, 2000, 01, 03년 호주 오픈을 제패했다.
◆카리스마 없는 강자
확실한 엘리트이면서도 절대강자로는 군림하지는 못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보다는 나이가 들면서 존경받는, 인간적 매력이 더 돋보이는 선수로 기억될 것이다.
보그나 코너스, 매켄로처럼 천하무적으로 풍미했던 시절을 갖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며, 피트 샘프라스란 숙명의 강자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양성과 영구성에서 애거시는 최고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참으로 다양한 상대와 싸웠다.
70년대 인물인 지미 코너스와도 겨뤘고, 신세대 라파엘 나달과도 신구 최대의 스트로크 대결을 벌였다.
선배들인 코너스, 잔 매켄로, 매츠 빌랜더, 이반 렌들과의 맞대결은 붙은 시기를 감안해야 한다. 가장 나이가 많은 코너스와는 코너스가 퇴장기에 붙었기 때문에 2번 모두 애거시가 이겼다. 매켄로와는 2승2패였다. 끈질긴 스트로크가 무기였던 매츠 빌랜더에게는 애거시가 5승2패로 앞선다.
그러나 이반 렌들에게만은 약했다. 렌들이 은퇴하기 직전까지도 당하지 못했다. 애거시의 강타가 무겁고 안정됐지만 렌들의 스트로크는 탑 스핀은 적지만 더 빨랐다.
동년배와의 대결이 백미. 피트 샘프라스와는 14승20패로 열세. 샘프라스만 없었더라면 애거시 세상이었을 것이다.
베커, 에드버그, 마이클 챙, 패트릭 래프터, 고란 이바니세비치, 짐 쿠리어 등과 겨뤘는데 서브 앤 발리 플레이어들이 애거시 때문에 전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붐붐’ 서버 보리스 베커는 아예 애거시의 밥이었다. 베커가 전성시절에도 번번이 당했고 나중에는 한번도 못이겼다. 10승4패로 압도. 에드버그 역시 그랬다. 은퇴 무렵에는 애거시의 스트로크를 전혀 처리하지 못하고 식은 죽 먹듯 패싱을 당했다. 역대 6승3패로 애거시의 압승.
뒤이어 등장한 패트릭 래프터도 10승5패로 상대가 안됐고 이바니세비치와는 4승3패로 호각세였다.
애거시는 막강한 스트로크를 갖고 있었지만 같은 강타 플레이어인 짐 쿠리어에게는 밀렸다. 쿠리어가 물이 한창 올랐던 시절 그랜드슬램을 몇 번이나 내줬다. 5승7패로 애거시 열세. 마이클 챙과는 초반을 빼고는 힘에서 너무 차이가 나 15승7패 압승.
신세대 젊은이들과도 해볼 만했다. 로저 페더러 한테는 못 당하지만 미국의 차세대 희망이라던 앤디 로딕을 비롯 미국의 젊은 선수들은 아직 누구도 애거시를 이기지 못한다. 로딕에게 애거시가 난공불락의 벽이다. 애거시가 5승1패로 압도하며 제임스 블레이크 역시 4승1패, 테일러 덴트에게는 5승 무패를 거두고 있다.
현역 최고봉 페더러와 나달에게는 이기지 못한 것이 다행일 것이다. 나달한테는 0승2패, 페더러와는 3승8패의 전적을 기록했다. 안녕, 안드레.
젊은 시절 애거시는 폭발적이었다. 처음 보는 강타가 그랬고, 물들인 긴머리와 이어링, 패션이 도발적이었다. 열성팬과 안티팬을 동시에 몰고 다녔다.
<케빈 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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