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지 1년. 뉴올리언스는 아직도 복구 중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복구작업을 제대로 시작도 못한 단계여서 도시가 언제 이전의 모 습을 찾을 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한 폐가, 산을 이룬 폐허의 쓰레기 더미, 키 높이로 무성한 잡초 밭…사이사이로 띄엄띄엄 이재민들이 들어와서 삶을 다시 일구는 모습을 TV로 지켜보았다. 1,577명의 인명을 앗아가고, 49만3,000동의 건물을 파괴한 카트리나는 1928년 플로리다를 강타한 허리케인 이후 미국 역사상 최악의 재해로 기록이 되고 있다. 특히 가슴이 아픈 것은 미국에서 지지리도 못 사는 동네,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다.
연방의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피해가 심한 이재민 70만명을 놓고 볼 때 5명에 2명 이상 꼴로 흑인이고, 5명에 한명 꼴은 빈민층이며, 10명에 한명은 노인이다.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나운 물살에 떠밀려 뿔뿔이 흩어졌는데, 1년이 지난 지금 거처도 일자리도 없어 절반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도 한인들은 발빠르게 복구 작업을 시작해 상당히 안정을 되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피땀으로 일궈놓은 사업체, 가족의 숨결이 구석구석 스며있는 정든 집을 흙탕물에 점령당하고 났을 때의 절망감을 그들은 이제 털어 냈을까. 절망을 밀어낸 그 자리에는 무엇이 들어섰을까.
재난 혹은 역경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다. 극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절벽 같은 캄캄함을 생애 몇 번씩은 경험한다. 그런데 도저히 나아갈 데가 없을 것 같이 완강하게 앞을 가로막는 높은 산도 가까이 가보면 경이롭게도 길을 열어 우리를 산너머로 인도해주는 신비가 있다.
화가인 한 친구가 두달 전 집에 불이 나서 모든 것을 잃었다. 작업실이 수리 중이어서 집 마당에 텐트를 치고 1,000여 점의 작품들, 물감들, 화구들을 임시로 보관했는데 몹시 뜨겁던 어느 날 불이 났다. 110도를 넘나들던 고온, 오후 3시의 뜨거운 태양, 그리고 유화 물감 - 30년 작업은 3분만에 잿더미가 되었다.
화가로서 생명과 같은 것들을 모두 잃어버린 후 그는 겉으로 웃고 다녔다. 충격과 고통을 맞대면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슬프지 않다’ ‘괴롭지 않다’며 현실 부정의 최면을 걸었던 것 같다. 하지만 꿈에서는 달라서 “물감에 붓을 대지 못하는 게 슬퍼서, 다 타 없어져 버리는 물감을 보며 헉헉 울다가 잠에서 깬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재난의 경험 속에서 얻는 것이 있었다. 몽땅 잃음으로써 얻는 선물 - 소유를 보는 새로운 시각이다. 그는 말했다.
“가장 아끼던 작품 2점을 스폰서에게 주고는 내내 아까워했었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주길 정말 잘 했어요. 내가 움켜쥐고 있던 건 다 불타고 남에게 나눠 준 건 다 남았어요. 주는 게 남는 것이더군요”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 그는 친구의 트레일러에 살고 있다. 외딴 산속에 마침 친구가 빈 트레일러를 가지고 있어서 신세를 지고 있다. 전기도 수도도 없이,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를 가지고 사는 ‘무소유’의 경험이다.
“살아보니 우리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건 정말 얼마 안되더군요. 집이 불타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경험하지 못했을 삶을 지금 즐기고 있어요”
소유를 덜어내니 찾아드는 존재의 가벼움- 그는 ‘잠자리가 날듯이 산다’고 표현했다. “왜 애초부터 이렇게 살지 않았나 싶다. 신이 친 뒤통수가 너무 멋지다”고 그는 덧붙였다.
신영복 교수의 옥중 서간을 보면 나이테에 관한 글이 있다.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 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카트리나 재난, 친구의 화재, 신영복 교수의 오랜 감옥생활 - 동토의 경험들이다. 동토, 그 역경이 더 단단한 나이테를 만들고 우리 존재의 나무는 더 풍성해진다. 재난 속에는 때로 다른 얼굴이 숨어 있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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