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늙어 노파가 되면 심홍색 옷을 입으리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는 빨간 모자를 쓰리라/연금을 받으면 브랜디를 사 마시고 여름 장갑을 살 거야 /비단 샌들도 한 켤레 사고, 그리고는 버터를 살 돈이 없다고 나는 말할 테야 /피곤하면 페이브 된 길가에 퍼질고 앉아 쉬기도 하고 /가게 안의 샘플들은 모두 먹어 보고, 그리고는 알람 벨을 눌러줄 거야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난간에 막대기 굴리기도 해보고 /맑은 정신으로만 살아온 내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상할 거야 /비 오는 날 슬리퍼 신고 밖에도 나가고, 남의 정원에 들어가 꽃도 꺾고 /그리고 침 뱉는 짓도 배울 거야… (이하생략)
이 시의 제목은 ‘경고문’이다. 제니 조셉(Jenny Joseph, 1932- )이라는 이 영국 시인은 많은 작품을 발표해 왔다. 그 중에서 가장 사랑 받는 시가 이 ‘경고문’이다. 특히 중년 이후의 영어권 여자들은 대부분 처음 몇 줄을 암송할 줄 안다. 내 사무실 클립보드에 꽂혀 있는 이 시를 번역해 보았다.
재미있고 참신하고 속시원하고, 하하 웃음이 나오는 것은 나 혼자만의 기분인가. 정말 우리 모두가 얼마나 바쁘고 긴장된 매일을 살고 있는가, 집안 일, 아이들, 남편, 친척, 이웃들, 거기에다 직장까지. 절약하고, 자제하느라, 언제 내 멋과 기분을 위한 여유가 있었던가.
이렇게 젊은 시절을 모범 답안지처럼 살다가 언제인가는 아니, 너무도 빨리, 파파 할머니가 되고 말 것이다. 그때 가서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는지 두고 보아라. 나는 지금 경고한다, 나는 이렇게 살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만 살아왔던 젊은 날을 이렇게 보상받을 것이다. 이 시 ‘경고문’은 인생 황혼에 얻을 자유와 체념, 주체성, 해방감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웃음 뒤에 묻어 있는 멜랑콜리를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아름답게, 여유 있게, 서서히, 젊음에서 멀어지는 것. 새로운 차원으로 한 계단 성장하는 과정. 이렇게 그럴듯하게 말 해보지만, 늙음이란 기쁨을 주는 단어는 결코 아니다.
“청춘은 젊은이들에 의해 낭비 당하고 있다”고 한 작가는 말했다. 세월이 흘러 드디어 젊음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는 지각이 생겼을 때는 이미 너무 멀리 젊음으로부터 지나와 버렸다는 얘기다. “아직도 마음은 청춘인데”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늙어버린 사람이다.
그러나 나이가 반드시 젊은이와 늙은이를 가름하는 잣대는 아니다. 쉰 살에 이미 마음과 몸이 노쇠해 버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팔십세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과시하는 나이 많은 젊은이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래서, 아직도 마음은 젊은데가 아니라 언제나 마음이 젊어야 하는 것이다. 젊은 마음은 열정이다. 뜨겁게 열광 할 줄 알고, 건강한 호기심을 소유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편들 줄 알고, 밤이 늦어도 친구와 속닥거리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인가를 추구해 보는 열정, 그런 마음이 아닌가 한다. 살아온 햇수는 우리들의 피부에 나이테를 더 해주지만, 열정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 영혼을 주름지게 하는 일이 아닐까.
100세를 전후한 노익장 할머니 골퍼들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들은 일주일에 두번씩 골프를 치고, 함께 여행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보이프렌드가 있어 개인행동을 가끔 한다고. 젊은 마음으로 젊게 사는 방법도 사람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언젠가 나도 자줏빛 드레스에 빨간 모자를 쓰고 연금을 타서 내 마음대로 흥청거릴지 모른다. ‘경고문’의 주인공처럼 완전히 자유로워져 슬리퍼를 신고 비오는 거리를 휘젓고 다닐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 나는 침을 뱉거나 남의 정원에서 꽃을 꺾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겁이 많다.
송정원
베벌리힐스 도서관 사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