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 동부에서 살 때 레바논 태생 친구가 있었다. 그는 미국인 남성과 결혼해 미국 시민이 되었지만 부모 형제들은 당시까지 레바논에 살고 있었다. 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해 연일 뉴스가 되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레바논의 가족들을 걱정하며 레바논에서 자라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폭격 소리, 사이렌 소리를 안들은 날이 없었던 것 같아. 으레 그러려니 하며 살았으니까. 학교에서 공부하다가도 폭격소리가 들리면 우리집 쪽은 아닌가 방향부터 잡아보고, 식구들끼리 수시로 안부를 챙기는 게 일이었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레바논은 역사가 오래고 아름다운 나라이다. 비옥한 만큼 탐내는 데가 많아서 시대를 따라 등장한 강대국들이 번갈아 가며 점령을 했다. 1943년 프랑스를 마지막으로 독립한 후 마침내 평화를 맞는 가 했지만 1975년 내전이 터지고 중동전쟁에 휘말리면서 20년간 전쟁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레바논이 다시 불구덩이가 되는 광경을 TV 뉴스로 보면서 오래 전 친구 생각이 났다. 그 친구를 비롯, 300만쯤 되는 미 전국의 레바논 계 시민들은 지금 얼마나 불안할까. 우리가 좋아하는 산문시집 ‘예언자’를 쓴 칼릴 지브란의 후예들이다.
레바논의 정치 무장조직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4주 째로 접어들고 있다. 이번 싸움은 헤즈볼라가 먼저 도화선을 건드린 측면이 있지만 그에 대해 이스라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광포한 무차별 공습으로 보복을 시작했다. 헤즈볼라의 뿌리를 뽑겠다며 민간인 지역들을 폭격해 도시가 초토화하고 어린아이들을 포함, 근 7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보복이 더 큰 보복을 부르는 처참한 보복전은 끝날 기미가 안보이고, 그 중간에서 무고한 레바논 국민들만 고통을 당하고 있다. 미국의 레바논 커뮤니티는 가슴을 조이며 모국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한 레바논 계 시민은 말했다.
“레바논 인구는 400만이다. 거기서 몇 백명이 죽었다는 것은 미국으로 치면 수백만명이 죽은 셈이다. 지금 100만이 피난길에 올랐다는데 그건 전국민의 1/4이다. 그 참상이 오죽하겠는가”
19살의 레바논계 청년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베이루트 교외의 지하실에 피난 중이라며 분노와 좌절을 토로했다.
분노와 좌절은, 가족·친지의 안부를 걱정하는 숨막히는 불안과 함께, 레바논 계가 느끼는 대표적 감정이 될 것이다. 오랜 적국인 이스라엘에 대한 해묵은 분노, 그리고 이스라엘 편들기를 멈추지 않는 미국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다. 친 이스라엘이 주류의 정서인 미국에서 아랍계로 분류되는 그들은 설자리가 별로 없다.
이민자로서 가장 어려운 때는 내가, 혹은 부모가 태어난 모국과 현재 살고 있는 제2의 조국이 적대적 위치에 서있을 때이다.
미국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이민자들에게 너그럽게 문을 열어왔지만 일단 문안으로 들어서면 소수계로서의 무력감과 소외감, 모멸감과 억울함을 견뎌내야 하는 것은 이민자 각자의 몫이다.
1, 2차 대전 때 독일, 이탈리아, 일본계 시민들이 경험했던 공공연한 징벌이 대표적인 예. 수용소에 감금당한 일본계가 가장 고통을 당했고, 이탈리아계, 독일계도 못지 않은 불안한 생활을 했다. ‘적국의 스파이가 아닌가’감시하는 편견 속에 항시 시달리고, 길거리에서 집단 폭행을 당하는 것은 물론, 트집거리만 있으면 잡혀가기 일수였다.
‘우리는 미국 편’이란 걸 내세우기 위해 이탈리아계는 자진해서 아들들을 전쟁터로 내보냈고, 독일계는 전쟁 구호물자를 모으고 미군의 승리를 비는 공식 기도회를 여는 데 앞장섰다.
전후 일본계는 자녀들의 이름을 미국이름으로 바꾸고, 아이들에게 일본어 대신 영어를 쓰게 하며 미 주류사회에 발벗고 동화함으로써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북한이 숙명처럼 따라 다니는 우리로서는 레바논 사태가 남의 일 같지 않다. 북미관계가 삐끗해 무력사태로 번지는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참혹하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미주한인들 모두가 할 수 있는 한 양측 긴장을 완화하는 윤활유 역할을 했으면 한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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