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멕시칸 수퍼마켓을 간다. 가게문을 열고 들어서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온갖 종류의 과일들과 채소들이 신선한 모습으로 저마다의 향기를 내뿜고 있다.
이 마켓을 찾아오는 동양인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매주 수요일, 어떤 때는 하루걸러 이 마켓을 오는데 그 때마다 매장 안을 둘러봐도 동양인은 나 혼자다.
나는 양배추를 집어든다. 6파운드에 99센트면 정말 대단한 세일이다. 나는 필요한 것보다 서너개를 더 집어든다. 가게에서 팔다 남으면 집으로 가져가면 될 것이다. 수요일이면 언제나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집어들고 또 적어간 목록에는 없지만 물건을 보는 순간 아하, 이것도 필요하지, 저것도 필요하지, 하면서 마구 집어넣는다. 그리고는 혼자서 속으로 웃는다.
아내를 탓할 일만은 아니구먼. 장보러 가면 늘 아내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꼭 더 많은 것들을 사오게 된다고 모처럼 멀쩡히 앉아 신문보고 있는 나에게 뜬금없는 불평이다. 꼭 필요한 것만 사야지 하고 모질게 마음을 먹어도 막상 마켓에 들어서면 눈에 뜨이는 것마다 다 필요하니 어쩌면 좋으냐고 괜히 속상해 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예 마켓을 하나 시작한 게 아닌감. 멕시칸 파를 사고 난 뒤 양파를 고르러 간다. 오늘은 빨간 양파, 노란 양파, 하얀 양파 모두 필요하다. 가게 안은 벌써 멕시칸 아줌마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카트를 요리조리 조심스럽게 밀며 양파 있는 곳으로 간다. 서너명의 멕시칸 아줌마들이 양파 앞을 가로막고 있다. 수다떠는 폼들이 같이 온 일행인 듯 싶다. 뒤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슬그머니 팔을 앞으로 내민다.
한 아줌마가 돌아보더니 틈새를 만들어준다. 고맙다는 미소를 보내고 양파 앞으로 다가선다. 양파를 고르고 있는데 오른쪽 왼쪽의 아줌마들이 바짝 조여온다. 다른 손님에게 또 자리를 만들어 주는 모양이다. 그 바람에 나는 양 옆 아줌마의 저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엉덩이 사이에 끼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양파들이 먼저 웃음을 터트리고 주위 아줌마들도 따라 웃고 나를 꼼짝 못하게 하고 있는 아줌마들은 더 크게 웃으며 엉덩이에 힘을 준다. 나도 엉덩이에 힘을 주어보지만 어림도 없다. 아, 상상해 보시라! 뒤룩뒤룩 살찐 여인들의 거대한 히프 사이에 꼼짝없이 끼어있는 오척 단신의 대머리 진 코리안을.
그래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양파를 고른다. 튼실하게 생긴 놈이 저만치 있으면 팔을 길게 뻗어서는 오른쪽 왼쪽 아줌마의 비닐봉지에 담아준다. 그네들도내 봉지에 아담하게 생긴 양파를 골라 담아준다. 오늘은 양파장사가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때 우리 가게의 바로 뒷집에 살고 있는 엘마가 아이들을 줄줄이 데리고 마켓을 돌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냅다 흔든다. 내가 다가가 “하이”를 하며 아이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하는데도 아이들은 무엇이 부끄러운지 엄마 뒤로 숨고 카트 뒤로 돌고 저 만치 달아나서는 물건 뒤에 숨어 수줍은 듯 나를 바라본다. 되게 숫기 없기는! 꼭 나 어릴 때 나를 보는 것 같아 혼자 씨익- 웃는다.
엘마는 내가 여기에서 야채를 사다 되파는 것을 알면서도 하루에도 서너번은 우리 마켓에 들러 야채를 사간다. 물론 왜 비싸냐고 물어보는 일은 단 한번도 없다. 엘마 같은 단골손님이 한 열 명만 있어도 장사하기가 무척 편하겠다. 어지간히 야채 코너를 돌고 나면 조금 배가 고파진다. 그때쯤이면 저쪽 입구 한 옆에 자리잡은 멕시칸 베이커리에서 굽고 있는 구수한 빵 냄새가 솔솔 코끝을 간지른다.
나는 야채로 가득 찬 카트를 끌고 빵 코너로 다가가 방금 꺼내다 놓은 빵 서너 개와 블랙커피 한 잔을 사든다. 그리고는 장 본 카트는 안에 놔두고 마켓 입구 밖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아 빵과 커피를 즐긴다. 부드러운 아침 햇살을 빵에 바르고 마켓으로 들어서는 아줌마들의 환한 미소를 커피에 타서 함께 먹는 그 맛이란!
아침 일찍 멕시칸 마켓으로 장보러 가는 일은 즐겁다. 푸른 야채보는 일이 즐겁고, 싱싱하고 잘 생긴 과일을 고르는 일이 즐겁고, 말은 통하지 않지만 어릴적 용문동 시장의 아주머니들 같은 멕시칸 아줌마들과 함께 어울려 이리저리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일이 즐겁다.
오늘도 나는 아내보다 먼저 장보러 집을 나선다.
이윤홍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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