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렬(교육가)
우리는 숫자 속에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 생활용품의 가격, 교통기관을 이용하는 요금, 메시지를 주고 받는 유·무선 전화번호, 주거지의 주소, 텔레비전 채널, 각종 성적, 옷·모자·신의 크기, 경제생활… 등 어느 것도 숫자로 표기되지 않는 것을 찾기 힘
들다. 그래서 숫자에 익숙하고 예민하다.
‘머리가 좋다’는 말 대신 IQ의 숫자를 말하면 그 정도를 쉽게 알 수 있다. 지능지수는 그렇다 하더라도, EQ 즉 감정지수는 어떻게 측정하는 것일까. 그것 역시 측정하는 방법이 연구되어서 현재는 교육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우리는 소위 추상명사도 구체명사처럼 계량화하는 지혜를 가지게 된 것이다. 왜인가. 숫자로 표시하는 것이 사물의 이해를 쉽게 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 슬픔, 책임감, 민족의식, 자유추구심, 경쟁력, 등 보이지 않는 것도 즐겨 숫자로 표시하려고 시도한다. 요즈음 발표된 것 중에 ‘친절도’를 숫자로 나타낸 것이 있어 흥미롭다. 거기에 따르면 35개국 큰 도시인을 테스트 한 결과 뉴요커가 1위이고, 서울이 32위라는 것이다.
각 큰 도시 시민의 친절도를 측정한 방법이 특이하였다. 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설명에 따르면 조사원이 각 도시의 시민 60명을 대상으로 3가지 반응을 본 것이다. 첫째, 뒤따라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가. 둘째, 업소에서 조그만 물건을 샀을 때 점원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가. 셋째, 혼잡한 길에서 서류뭉치를 떨어뜨렸을 때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는가.
화면으로 소개된 셋째번 장면에서 무심하게 그냥 지나가는 사람과 앉아서 같이 서류 집기를 도와주는 사람이 보였다. 어떤 영화에 상대방이 험한 말로 대꾸를 하니까 ‘당신은 아무래도 뉴욕에서 온 것 같다’는 대사가 있었다. 그런데 친절도가 1위라니 그만큼 향상된 것일게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온 뉴요커의 친절도는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이것들은 하여튼 재미있는 측정 방법이고 친절에 대해 생각할 계기가 된다. 친절은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면서 서로의 관계를 따뜻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상대방이 친절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주로 태도, 표정, 말씨 등의 표현 방법에 달렸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남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바탕에 있어야 하겠지만.
우선 태도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본다. 일단 상대방 이야기를 듣는 자세를 취하고 기다린다. 무엇이든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말해보시오 라는 태도는 곤란하다. 또 상대방과의 눈맞춤도 중요하다.다른 곳을 보면서 이야기를 듣는다면 상대방에게 실례가 된다.상대방을 친구 대접하면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억지로 미소를 띠지 않더라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굳은 표정으로 대하면 상대방은 말하는 용기를 잃을 지도 모른다. 때로는 오해할 수도 있다.
말씨는 친절도를 나타내는 도구이다. 알맞는 음성의 크기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면 될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흔히 말한다. 즉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실례합니다’를 가리킨다. 이런 말들을 적재적소에 알맞게 사용하면 보물이 되는 것이다.우리는 오랫동안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이 점잖지 않다는 사회 풍조 속에서 생활한 탓인지 대체로 무표정하기가 쉽다. 그래서 감정 표현이 풍부하고 때로는 과장되는 경향이 있는 서구인이 볼 때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별로 친절하지 않다는 인상을 줄 수가 있다. 그들은 우리를 가리켜 ‘돌과 같은 얼굴’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한국계 미국인이다. 뉴욕에 살더라도 친절도 1위가 아니고, 서울에 살지 않더라도 32위에 무관심할 수 없는 처지이다. 남에게 친절하다는 것은 나 자신도 기쁘게 하는 작용을 한다. 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하늘이 파랗게 보여서 삶을 구가하게 된다. 나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이런 느낌을 줄 수 있지 않은가.
다음에는 길을 물었을 때, 산 물건을 되돌리거나 바꿔달라고 할 때,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표값이 모자랄 때 등 더 다양한 현장을 연출하여서 친절도를 조사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친절도를 현장 연출로 측정한 점이 현명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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