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잔치는 끝났다.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출이 좌절되면서 6월의 흥분은 가슴 아린 실망으로 바뀌었다. 빨간색 응원복을 몇 번은 더 입고 싶었던 기대, ‘대∼한 민국’의 함성으로 답답한 현실을 좀 날려버리고 싶었던 바람, 조별 순위·승점을 따지며 승승장구의 단꿈에 가능한 한 오래 젖고 싶었던 소망은 이제 물거품이 되었다.
23일 한국이 스위스에 패함으로써 월드컵에 기꺼이 끌려 다니던 우리의 삶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응원은 추억이 되었다.
월드컵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첫째는 한국이 축구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더 노력해야겠다는 아픈 자각, 둘째는 응원 규모로 드러나는 한민족의 힘이다. 경기 때마다 100만여 인파가 모여드는 서울의 광장응원도 인상적이지만, 독일 현지를 휩쓰는 원정 응원단을 보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잘 살게 되었는지 실감이 난다.
20대 중반 딸의 친구 중에 월드컵 응원 차 독일을 방문중인 청년이 있다. 뉴욕에서 금융분야에 종사하는 한인 2세인데 얼마전 전화로 “독일 어디를 가나 한국!”이라며 흥분했다. 경기가 열리는 도시에 도착해보면 한국서 온 사람, 해외 한인 할 것 없이 코리안들이 거리를 메워서 마치 한국에 간 것 같다고 그는 신기해했다. 원정 응원은 꿈도 못 꾸고 원정 경기 나갈 국가 대표팀의 비행기 값, 식대를 걱정하던 시절이 불과 몇 10년 전이었다.
미주 한인사회의 응원 규모도 상대적으로 뒤지지 않았다. 남가주의 경우 프랑스와의 경기 때는 2만 석 스테이플스 센터를 통째로 빌리고, 스위스와의 경기 때는 새벽부터 주변 도로를 차단한 채 다울정에 수천명이 모여 단체 응원을 하며 힘을 과시했다.
월드컵을 통해 전 세계에 확실하게 알린 것이 있다면 한국의 응원 문화이다. ‘응원 월드컵’이 있다면 한국은 단연 우승이라는 조크가 대회 초반부터 외국 미디어들에서 나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치’나 ‘불고기’가 고작이던 세계인들의 한국관련 어휘력은 근년 ‘삼성’ ‘현대’ ‘LG’ 를 보태더니 이제 ‘대∼한 민국’을 확실하게 하나 더 보탰다.
응원은 경기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운동경기, 특히 축구가 재미있는 것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팀이라도 100%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이유는 단 하나, 선수가 로봇이나 컴퓨터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날의 컨디션, 사기, 승부욕에 따라 선수들은 경기장을 훨훨 날기도 하고 죽을 쑤기도 한다. 기계와 달리 사람은 감정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응원, 우레와 같은 함성이 날아가 꽂히는 부분은 바로 선수들의 감정영역이다. “잘 한다, 잘 한다”하면 왠지 힘이 펄펄 솟으며 더 잘 하게 되는, 우리는 감정의 동물이다.
70년대 한국에서 국가 대표선수 생활을 하다가 LA로 이민 온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응원은 한마디로 선수들의 기를 살려준다”고 말했다.
“경기 중 몸이 제대로 안 풀릴 때, 상대팀 선수와의 격렬한 태클로 넘어졌을 때, 응원소리의 효력은 대단합니다. 피곤한 것도, 아픈 것도 다 잊고 달리게 합니다”
한 정신과 의사는 경기중인 선수들의 심리상태를 위기의식에 견주었다. 어른이 어린이와 다른 점은 사고가 합리적이라는 것. 하지만 위기상황이 닥치면 어른도 유년기의 감정적 단계로 돌아가 버린다.
“경기를 한다는 건 전쟁터에 나가 있는 것과 같지요. 선수들은 원초적 감정의 상태에 빠집니다. 그때 관중이 열띤 응원을 하면 ‘아, 나를 밀어주는구나’감동을 받으면서 뇌에서 도파민, 엔돌핀 같은 호르몬이 나오지요.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힘이 솟아서 평소 생각하던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일이 생깁니다”
응원으로 맛보던 카타르시스도, 신화 실현의 예감도 이제는 추억이다. ‘앞으로는 무슨 낙으로 사나’라는 말이 당장 주위에서 나온다. 답답한 현실, 빡빡한 일상 - 응원이 필요한 곳은 바로 우리의 삶이다. “잘 한다, 잘 한다”하면 힘이 솟아서 더 잘하게 되는 그런 기적이 사실은 우리 삶에 필요하다. 박지성이나 안정환은 접고 내 삶의 이웃들을 응원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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