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태극기의 물결이다. 그 가운데 ‘대~한민국’의 연호가 울려 펴진다. 그 함성이 하나가 돼 거대한 메아리로 되돌아온다. 붉은 함성이 진동하고 있다.
깃발이 나부낀다. 한반도기다. ‘우리민족끼리’의 열창이 이어진다. 미군을 몰아내고 민족통일을 이룩하자. 거침없는 반(反)미다. ‘6.15 민족통일 대축전’- 그 현장이다.
해마다 맞는 6월이다. 그 6월이 올해에도 길게 느껴진다. 4년 전에도 그랬다. 16강. 8강. 그리고 4강. 대한민국이 요동쳤다. 그 감격에, 그 환희에 시간마저 정지한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총격전이 벌어졌다. 서해교전이다.
한반도 상공에 검은 구름이 자욱하다.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움직임이 몰고 온 구름이다. 그래도 온통 월드컵에만 매달린다. 무한정의 몰입이다. ‘한반도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 어느 신문 제목이었나. 월드컵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6월이 그래서 올해에도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건가.
역사는 되풀이된다. 요즘 유행하는 화두다. 테러 전쟁의 패러다임은 이제 안 통한다. 세계는 자유세계와 권위주의체제의 대립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불과 10여년 전의 냉전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어서다.
신냉전시대라고도 부른다. 포스트-포스트 냉전시대란 말도 들린다. 독재자연맹 대두설도 나온다. 용어의 차이일 뿐 다 같은 얘기다. 요지는 이렇다. 중국과 러시아가 축을 이룬 권위주의체제 연합이 형성되면서 서방과 점차 심각한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극체제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미국 일방의 시대는 끝났다는 점에서다. 갈등의 양상은 그러나 과거와는 다르다. 그 근본 원인은 에너지를 둘러싼 이해의 충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관의 대립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자유와 인권으로 요약되는 민주체제 확산을 권위주의체제는 생래적으로 거부한다. 마치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포스트-포스트 냉전시대의 갈등은 가치관의 대립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정황에서 새삼 주목받는 게 ‘상하이협력기구’(SCO)다.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 세 나라가 참가해 처음에는 그저 ‘상하이 파이브’로 불렸다. 2001년 이 기구는 이름을 바꾸었다. ‘상하이협력기구’로.
DJ가 한 때 SCO에 추파를 보냈다. 이 기구에 가입하겠다는 거였다. 미국의 눈살에 가입의사를 바로 철회했지만 어쨌거나 ‘상하이협력기구’는 그 때까지도 여전히 생소한 지역 내 기구였다.
이 기구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평화의 사명’이란 이름으로 중국과 러시아가 사상 최대 합동 기동훈련을 펼치면서다. 그 해가 2005년으로 SCO는 우즈베키스탄의 미군기지 철수를 촉구하는 성명을 채택했다. 미국에 대항하는 군사 블록화의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올해도 SCO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 날이 6월15일이다. 회원 수를 대폭 늘렸다. 인도에, 파키스탄에, 동남아시아 연합국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낸 것이다. 누구보다 눈길을 끈 참석자는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다.
그가 한마디 했다.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력과 외교력을 모아 미국에 저항하는 공동노력을 펴야 한다’고. 대륙 세력만, 다시 말해 유라시아의 권위주의 세력은 거의 모두 망라됐다. 일본, 호주 등 민주국가는 초청도 하지 않았다. 아니, 단호히 배격됐다.
우연이겠지. 민족통일 대축제인가 뭔가 하는 것과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담이 열린 날짜가 같은 ‘6.15’란 거 말이다. 우연일 거야. 애써 의미를 축소한다. 그런데도 뭔가를 상징하는 것 같다. 뭘까.
카오스 이론이라 했나. 나비가 날개 짓을 한 곳은 상하이다. 그 변화가 그런데 바로 바다 건너로 몰려들고 있는 것인가. 한반도 상공에 먹구름이 잔득 끼고 그 가운데 남쪽에서는 태극기와 한반도기가 충돌을 빚는 양상으로.
“포스트-포스트 냉전시대의 세계는 몹시 혼돈스런 세계가 될 것이다. 너무나 많은 악당들이 석유를 팔아 갑자기 부자가 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통제가 어려운 극히 위험한 세계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일찍이 한 말이다.
관심은 그래도 온통 월드컵뿐이다. 경제가 걱정이라고, 북한 핵 문제가 어떻다고, 이 모든 게 월드컵의 함성에 삼켜진다. 과도한 몰입이다. 불안한 현실에 대한 적극적 외면이 이런 현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닌지….
월드컵이 지나간 다음에 오는 현실은 과연 무엇일까.
sechok@koreatimes.com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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