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봐야 공놀이 아닌가. 애써 그 의미를 축소시킨다. 그런데도 일손이 잘 안 잡힌다. 눈과 귀가 TV로 쏠려서다. 월드컵 축구가 중계되고 있다. 흘낏 보고 돌아선다. 무관심한 척하는 것도 그러나 잠깐이다. 다시 눈과 귀는 축구로 향한다. 마성에라도 이끌리는 것처럼.
절로 질문이 배어난다. 마치 탄식같이. ‘축구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병과 돌이 날아든다. 의자가 날아간다. 의자를 떼어내 던진 것이다. 경찰이 차단선을 치고 선수 보호에 나섰다. 경기는 중단됐다. 그런데도 흥분한 군중은 좀처럼 흩어지지 않는다.”
이 사건은 곧바로 전 세계 외신을 탔다. 신문들은 사설까지 썼다. 축구장에서 흔히 있는 해프닝이다. 그런데 왜 세계적 뉴스가 됐나. 난동이 난 장소 때문이다. 평양이다. 2005년 3월30일 북한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관중의 난동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스탈린 시대의 소련보다도 더 통제된 사회다. 그런 북한에서 군중소요가 발생하다니. 난동이 발생한 축구장이 또 그렇다. ‘김일성 경기장’이다. 김일성의 이름을 땄으므로 북한에서는 성지(聖地)다. 그 성지의 기물이 파손됐다. 이건 여간한 변고가 아니다.
그 사태에 세계가 놀랐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축구란 도대체 무엇인가’-.
축구는 전쟁이다. 이데올로기이며, 강력한 종교이기도 한다.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의 저자 프랭클린 포어의 정의다. 축구에는 한 나라의 민족주의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 문화적 요소가 녹아 있다는 것이다.
축구는 전쟁에 준하는 집단적 격정이다. 축구처럼 정치성이 짙은 스포츠는 없다. 때문에 독재자로부터 혁명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세력의 애호를 받고 있는 게 축구다. 4년 전 그러니까, 서울 월드컵을 앞두고 뉴욕타임스가 내린 정의다.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얘기로 들린다. 요약하면 축구는 한 나라를 읽어낼 수 있는 주요 코드란 말이다.
이를 아랍·이슬람권에 적용해 보자. 축구는 이 경우 혁명의 도구로도 읽힌다. 수만명이 모이는 축구장은 체제 불만을 집단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때문에 테헤란, 평양 등지의 축구장에서 발생한 사건은 때로 세계적 뉴스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축구가 아르헨티나에서는 전혀 반대방향에 서 있다. 정치가 무너졌다. 경제가 와해됐다. 오랜 군사독재기를 거쳤다. 그 후에 찾아온 것은 무책임한 포퓰리즘의 정치다. 그 후유증이다. 이 상황에서 축구는 이데올로기가 됐다. 종교의 영역을 차지한 것이다.
마침내 대중이 일어섰다. 그 전위를 담당한 게 신흥종교의 사제들이다. 아르헨티나가 자랑하는 축구선수들이다.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빌리면 그러므로 아르헨티나의 축구 대표팀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좌파성향의 팀이라는 것이다.
‘기득권층을 타파하라’-. 그 운동이 ‘아르헨티나의 영광인 축구의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한 컬러가 겹쳐진다. 레드다. 4년 전 한국을 뒤덮었던 붉은 물결이다. 세계를 놀라게 했다. 스스로도 놀랐다. 월드컵 4강의 신화에. 그 환희, 그 경이는 사람들을 광장으로 내몰았다.
이후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은 광장으로 몰려든다. 그리고 다중의 그 높은 목소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드는 것이다. 밤이 되면 촛불까지 켜들고 말이다. 한 사회비평가는 이를 ‘광장병’이라고 했다. 붉은 악마 현상이 가져온 병폐라는 진단과 함께.
‘붉은 악마현상’은 모든 걸 변화시켰다. 세계를 놀라게 했다는 자부심은 우쭐거림으로 변모했다. 그 결과는 거침없는 기득권층 파괴다. 댓글인가, 퍼 나르긴가. 마음에 조그만 안 들면 인터넷을 통해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 새로운 정권까지 탄생시킨 것이다.
“2002년을 기점으로 월드컵은 우리에게 괴물이 됐다. 붉은 악마 현상에서 드러나는 맹목적 애국심, 개인의 주체성을 억누르는 군중심리 등은 파시즘의 병리현상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밤에 날개를 편다. 4년여의 진지한 되돌아봄 끝에 나온 자성의 소리다.
열광적인 월드컵 축제의 분위기 뒤에 드리워진 그늘을 제대로 살피자는 얘기다. 월드컵 광풍을 경계하자는 소리다.
그래도 온 통 월드컵 얘기다. 열기가 지나쳐, 광기로까지 느껴진다. 연습경기 응원 차 광장에 수만명이 몰렸다. 거기다가 월드컵 괴담도 나오는 판이니. 16강에 못 올라가면 대한민국이 뒤집어지고 중대사태가 발생한다고 했던가.
2006 독일 월드컵은 과연 어떤 상황을 불러올까.
sechok@koreatimes.com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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