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영(전 언론인)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우연(遇然)성과 필연(必然)성이라는 두 가지 운명의 줄기가 날줄 씨줄처럼 얽힌 굴레 속을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우연성과 필연성, 이 관계는 우리가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맞부딛치고, 그 때마다 토론하며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 생활상의 문제이자, 학문적으로도 한 쌍의 범주로서 별도항목의 연구대상으로 되고 있다.
사람은 어차피 죽기 마련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이 죽는 패턴은 제 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80을 넘겨 살다 가고 어떤 이는 젊어서 중병에 걸려 요절하며, 그런가 하면 김 아무개는 교통사고로 죽고 박 아무개는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며 어떤 이는 범죄피해자로 희생되기도 한다. 이 모든 구체적 죽음의 정형은 필연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우연한 원인으로 인한 것들이다.
필연성이란 불가피하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사물의 본질적 추세라면 우연성은 그렇게 나타나기도 하고 다르게도 나타날 수 있는 비본질적 현상이다. “필연성은 우연성을 통하여 표현되고 우연성의 배후에는 항상 필연성이 존재한다”라고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다고 할까? 우선 필연성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역사에서 보게 된다.
처절한 ‘크리미아’전쟁 중인 1854년 11월 어느 날 흑해상공에 폭풍이 일어 ‘바클라와’항에 정박 중이던 영, 불 연합함대가 큰 피해를 입은 사건이 있었다. 파리 천문대는 그 때 그 폭풍에 대한 조사를 진행, 유럽 각지의 기상정보를 수집한바 그날 하루 전에 지중해 상공에 그 폭풍이 나타났음을 알게 된다.
천문대측은 만약 곳곳에 기상대를 세우고 유선전보(그 때는 무선통신기술이 없었다)로 제때에 정보를 전달한다면 피해를 예보, 재해를 막을 수 있다고 파리정부에 보고 하였다. 프랑스정부는 이 제의를 수용, 적극 지원함으로서 얼마 후 전보로 전달된 정보에 의해 그려진 첫 일기도가 등장한다. 역사상 첫 천기예보는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만약 이 우연한 사건(흑해의 폭풍과 함대의 피해)이 없었더라면 천기예보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당시 자본주의가 싹트고 발전한 유럽사회에서는 천기예보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유선통신기술수준과 그 밖에 조건들은 이를 가능케 하였다. 흑해폭풍사건이 아니더라도 천기예보는 조만간 나오기 마련이었고 따라서 일기 예보의 탄생은 역사의 필연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필연성을 입증할 수 있는 예는 이 밖에도 많다. 예컨대 과학역사에서 수 많은 중요한 발견들은 흔히 몇 사람이 동시에 각각 독자적으로 완성한 경우를 우리는 본다. 뉴턴과 라이프니쯔는 모두 동시대 미,적분학의 창시자이며, 다윈과 알프렛 월리스는 제 각기 진화론에서 자연도태에 관해 같은 결론을 내렸다.
역사상 어느 인물이 어느 나라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지만 그 때 그 인물이 거기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조만간 다른 곳에서 나와 시대가 요구하고 과학이 입증하는 진리와 업적을 이뤄 낸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자주 보아 왔다.
필연성과 우연성이란 이 철학적 명제는 우리 개인 생활에서도 수 없이 부딪친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이 우연적 사건을 “그 사람은 팔자에 차에 치어 죽을 운명이야...”라는 식으로 필연성을 결부시킨다면 숙명론이란 억지 논리로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길을 갈 때 차 조심을, 운전자는 교통규칙을 준수할 필요가 없게 되며 당국은 교통망을 정비 강화할 이유도 없어지고 교통사고 예방 대책도 무의미하게 된다.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우연한 사고가 죽은 자의 팔자라면 풀밭에서 뱀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한편 역사의 필연성을 부인하고, 역사는 수많은 우연성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면 역사의 법칙성을 발견할 수 없게 되고 역사는 뒤죽박죽 제멋대로 흐른다는 황당한 결론에 이르게 되며 역사학이란 과학도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우리가 필연성을 부인하고 우연성만 과장하면 인생만사 운수소관으로 보고 요행만 바라는 소극적 인생관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필연성과 우연성은 이렇게 다른 것이지만 서로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서로 의존할 뿐 아니라 일정한 조건에서 전화(轉化)하기도 한다. 어느 과학자가 어느 때 어느 나라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역사발전을 놓고 볼 때 우연한 사건이지만 당사자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평소 꾸준히 연구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열심히 실험했기 때문에 우연한 기회를
잘 포착하여 대성을 거두는 필연의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축구황제 펠레가 1천 번째 골을 성공시키는 대기록을 세운 것도 평소 그의 피나는 노력과 함께 꾸준히 연마한 것을 보아 언젠가는 얻어내고야 말 필연의 결과지만 구체적으로 골인시키는 정형은 제각기 우연이다. 어떤 때는 골문 앞에서 강슛으로, 어떤 시합에서는 헤딩으로, 또 어떤 때는 멋진 마이너스 킥으로 골인을 성공시킨다. 이렇게 필연성과 우연성은 서로 의존하고 전화되기도 한다.
우연성과 필연성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옳게 이해할 때 사람은 올바른 역사의식, 건전한 생활태도, 인생관을 확립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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