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주필)
6월에 김정일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는 김대중 전대통령이 지난 23일 서울에서 열린 한 국제학회의 연설에서 방북시 “부당하게 분단된 민족통일을 이야기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대통령 자문기관인 동북아시대 위원장이란 사람이 “통일방안을 논의하겠다. 정상회담을 하
겠다고 너무 큰 기대와 목표가 논의돼 초점을 모르겠다”고 DJ의 말을 비판했다. 그랬더니 열린우리당 쪽에서 난리가 났다. 이런 망발을 한 사람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DJ의 편을 들고 나선 것이다.
DJ는 야당시절부터 3단계 통일론을 주장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통일 논의가 금기시 됐던 시절에 그의 통일론은 국민들에게 하나의 대안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논의와 실행은 큰 차이가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 운운하는 통
일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국민들은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통일이 우리 민족의 숙원인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통일문제가 나오면 마음이 왜 선뜻 움직이지 않을까.그것은 통일을 위한 여건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이라는 나라는 남한과는 너무도 다른 나라이다. 핵개발과 위폐 제조, 마약거래 등을 일삼는 불량국가이며 인권탄압과 독재정치로 악
명을 떨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면서도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개과천선의 의사도 없다.
통일을 이야기 할 상대가 도무지 되지 않는 나라가 지금 김정일이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북한인 것이다.남북통일을 개인의 결혼에 비유해 보자. 남과 북이라는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데 북이란 상대를 보니 성격이 포악하고 경제력이 없는 것은 물론 집안의 물건을 훔쳐내고 살인강도
까지 일삼는 악한인 것이다. 그 사람이 회개한다면 몰라도 지금 상태에서 배우자로 맞아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결혼해 보았자 행복은 고사하고 불행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야 결혼을 하지 못하고 혼자 사는 한이 있더라도 결혼을 서두를 일이 아니다.
통일을 아예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북한을 상대로 통일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DJ측은 이번 방북이 정부와 무관한 개인적 방북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북한과 DJ의 방북절차를 논의했고 노대통령이 몽골 방문시 북한에 많은 양보를 하겠다고 말한 것이 DJ 방북을 위해 멍석을 깔아준 일이라는 것은 모를 사람이 없다.
정부 관계자도 “연내에 남북정상회담이 바람직하다”고 말함으로써 DJ를 통해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음을 암시했다.그의 방북이 개인적인 방북이든 정부의 대북창구역할을 위한 방북이든 간에 양측의 이해와 목
적이 일치했기 때문에 이 방북이 이루어진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DJ의 면모를 볼 때 그가 매우 야심적이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기회 포착에 능수능란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그가 볼 때 앞으로 한국에서 보수정치가 복귀하면 자신이 만들어놓은 6.15 성과가 물거품이 되고 자신의 업적이 국가와 민족을 오도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지금 그나마 노정권이 있을 때 남북관계를 기정사실로 더욱 굳혀 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정부여당은 오는 31일 지방선거에서는 이미 야당에 대패하게 되어 있고 앞으로 정권마저 내놓게 될 것같은 위기감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국민들의 지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국론도 통일하지 못하는 현정부가 통일을 운운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남은 카드란 북한밖에 없는데 이 북한과 길을 트는데는 DJ가 적격이라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 60세 노인들은 투표장에도 나오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했던 그들이 80대 노인, 그것도 몸도 불편한 전직 대통령을 북한에 보내겠느냐 하는 의문이 든다.
DJ의 방북이 DJ 개인의 업적 굳히기이든지 정부여당이 원하는 북풍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든지 간에 김정일과 통일이 어쩌구 저쩌구하는 것은 분수에 넘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지금 그대들의 목적을 위해 통일을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통일문제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걸린 일이므로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자기의 의사로 끌고 갈 수는 없다. 통일은 전적으로 국민적 합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고 대통령이나 정부는 그 합의를 집행하는 역할만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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